연세대학교 총동문회

동문 소식

연세동문회보 콘텐츠 시작

[동문칼럼] 윤동주시인의 고향은 또다른 나의고향
등록일: 2019-11-25  |  조회수: 49

금년은 필자에게 분주한 한해였다. 아내 (배국희/이화여대사회학과졸)가 “제20회 KBS해외동포상”을 3월에 받았고,  6월에는 한민족의 천하명산 백두산천지를 찾아 연세대 역사상 최초로 모교의 페넌트를 백두산 정상에 휘날린뒤, 중국 길림성 명동촌의 윤동주선배의 생가를 아내와 함께 찾았다. 1961년에 입학한 필자는 1938년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신 윤동주선배의 후학이다. 중국에대한 호기심은 중국사람보다 중국말을 더유창하게하는 전인초박사 (국문과63/전 문과대학장)가 작년 6월 이곳 LA를방문하여 연세 동문들에게 “한국과 중국의 과거, 현제 와 미래를 생각해본다”에 대한 멋진 강의를 해준  덕택으로 꼭 방문하고 싶었던 차였다.

아시아나항공OZ331편으로 LA를 출발한것은 2019년 6월 19일 수요일밤, 인천공항을 경위하여 사회주의 공산국가 중국북경에 도착한날은 6월 21일 금요일 아침이었다.  다음날 우리는 천안문 광장을둘러, 뜨겁게 내려쪼이는 햇볕속에 그늘도 없는 자금성을 구경한뒤, 만리장성도 찾았다. 다음날 북경을 출발하여 연길에 도착하여 북간도, 곧 일제시대 두만강건너 만주벌판 독립운동의 본거지 용정( 그곳에선 ‘룡두레 우물’이라 칭함)으로 이동하며 그옛날 독립운동가들이 거닐었던 추억많은 해란강과, 노래 ‘선구자’에 나오는  ‘일송정 푸른솔’(아직도 그 일송정  소나무가 산정상에 살았있음)을 바라 보며, 이도백하로  이동하여 윤동주시인이 태어나 살던 생가와 그가다녔던 명동학교옛터를 찿았던것은 잊을수없는 일생의 소중한여행이었다. (참고:  “북간도”는 한국문학의  거장 안수길선생의  대하장편 소설을통해 만주 기독교 항일운동사로 우리에겐 잘 알여진 곳이기도하다. 안수길선생은  5대 연세미주 총동문회장을 지낸 마서준(전기공학61) 회장의 빙장이다)

윤동주시인은 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 지금의 중국 길림성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그곳에서 민족정신과 기독교 신앙으로 성장했으며, 그의 어린시절 이름, 아명은 “해처럼 빛나라”는 뜻으로 아버지가 지어준 “해환 (海煥)”이었고, 아들들에게 ‘해’ ‘달’ ’별’을 차례로 지어 주었다고 들었다.

필자가 먼저 찾아간 곳은, 윤동주가 다녔던 “명동학교옛터기념관”으로 당시의 학교이름이 아직도 십자가방폐(좌우로 明東 상하로 MT) 안에 원래의모습 그대로 건물에 박혀있었다. 소년 “해환”이가 다녔던 시절의 고색창연한 학교종도 이젠 수많은 세월이지나 녹청색으로 변해 본관 정문천장에 걸려있었다. 필자가 찾았을 때에는 내부공사가 진행중이었으며 이곳이 바로 북간도 민족교육의 가장 중추적인 문화와교육의 성장거점이기도 한곳이었다. 이곳을 떠나 용정에있는 은진중학교를 다니던 16살때 아명인 “해환”대신, 그는 새이름 “윤동주”를 쓰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 부터였다고한다. 시인윤동주가 다니던 명동학교 넓은 운동장 중간구석에는 한국시골에서나 보는 대형항아리들이 놓여 있었는데 이유는 알수없었다. 바로그옆으로 사람키 한배가 넘는 인상적인 설백의 대형 대리석에 시인윤동주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소개하는 또렷한 검은 한글 글씨체로 다음과같이 새겨져있다.

윤동주 (1917-1945)

“애국시인이다. 그는명동학교를 졸업한후 은진중학교를 다녔고 22살때부터 한국 연희전문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그후로 일본류학을갔다. 1943년 3월 재교 또 조선인학생 민족주의 집단사건에 휘말려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고1945년 2월16일 일본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살해되었다. 그는 일생동안117편의 시가와 산문을 발표하였는데 대표작으로는 <서시> <새로운길>등이있고 그당시 일본 제국 주의 침략죄행을 풍자하였다.”

명동학교를 설립한 교육활동가 김약연 선생의 흉상을 좌측으로따라, “중국 조선족 교육 제1촌”이라는 높은 기와 나무문을통해, 학교마당을 나와 왼쪽길을따라 가면 많은 과일나무들과 따먹을수있는 산딸기들이 사람키높이에 널려있고, 고즈넉하고 멋스러운 담길이있어 그의 친척인 송몽규가살던 옛집을 지나 십여분을 걸어가면 시골흙길의 왼편쪽으로 윤동주의생가가 나타난다. 그가태어난 집입구에는 거대한 대리석으로 왼편에 한글로 “중국조선족 애국 시인 윤동주 생가,” 우편에는 한문으로 “中國朝鮮族愛國詩人 尹東柱 故居”라고 검은 필체로 새겨져 있으며, 정문 에 들어서기전 오른쪽엔 한글로 “윤동주생가” 좌측에는 한문으로 “尹東柱故居” 라는 대리석 배경의 붉은체 글자가 좌우로 말끔히 정돈 되어있고, “연변 조선족 자치주 인민정부”가 “2007년 12월 28일공포. 룡정시 인민정부 2014 년 10월 25일 세움”이라고 분명하게 공식적기록을 새겨놓았다. 생가를 찿았던날은 푸른하늘에 구름한점 없는날씨가 유난히 화창하고 풀과 나무향기가  온누리를 흠뻑 채워 마치 아름다운 대자연의 품속에서 윤동주선배가 어디선가 사뿐히 걸어나와 두손을 펴며 후학의 방문을 기쁜마음으로 환영하는 듯하여 마음이 무척이나 흥겨웠다.

좁은 개울콘크리트 덥개를 건너 입구에 들어서면, 좌측에는 생가 안내소가있으며, 입구밖으로 원고지모양과 세개의 높낮이가 다른 수직대리석에는 각각다른 한문자와 한글이 새겨져있다: “風 天 星 詩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윤동주.” 입구를 들어서 왼쪽서편으로향하면 아담한 윤동주의 기념관이있다.  출생과 초등학교및 연희전문 시절 학사모를쓴 미남청년 윤동주의 독사진과 일본유학중 잠시귀국했던때 그의 동갑내기 고종사촌인 송몽규와 문익환과 정병욱등과 찍은 사진들도 질서정연하게 정렬되어 있었으며, 오디오설명을 통하여 그의 짧았으나 굵었던 인생을 잠시 역력히 살펴볼수있엇다.

기념관전시가 끝날쯤무렵에는 주황색의 죄수복을 입은 윤동주시인이 두명의 일본 軍醫에 의해 생체실험으로 독극주사후 두눈이 쇠약하게 감겨져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독살되는 끔직한 전범행위 현장의재현 모습으로, 하늘색 독극물등이 가득한 그릇앞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이 펼처지는 끔찍한 밀랍모형이 전시되어 있었다. 필자는  온몸에 전율과 공포로 갑작스런 현기증과 급성흉통을 느꼈다. 일본이 저질르고있는 이끔찍한 범죄적 야만행위 현장모습을 볼수가 없었다. 윤동주가 입고있던 죄수복 왼쪽 가슴앞에는 일본말로 위에서 밑으로“니혼 이또우슈 ~’ 번역하면 ‘일본 이또우 ~”… 끝맺음이 없어 뜻이 분명치 않아 무슨뜻으로 죄수복에 쓰여있었는지 합리적 가늠을 할수없었다.  혹시 안중근의사가 만주땅

하얼빈에서 침략의원흉 “일본이또우” 히로부미를 저격사살한 순국정신과 자신이처한 상황적연계를 생각했었던것은 아니었는지 멀리 미루어보았다.

기념관 전시실을 나와 다시 왼쪽으로 윤동주의 생가를향해 걸어가면 시인의 많은 시들이 한글과 한문으로 다종다양한 색갈의 작은바위 큰바위 타원형바위 네모바위등 여러 돌바위에 쓰여진 바위시를 볼수있으며,  생가에 가까히가면, 한글로 “윤동주생가” 한문으로 “詩人尹東柱生家” 라고쓴 큰획의 글씨가 부엌오른쪽 집대들보위에 평화스럽게 걸려있었다. 옛모습의 부억에는 세개의 큰아궁이위로 세개의큰솟과 몇개의 작은항아리들이 자리를 잡고있었다. 부엌은 말끔히 정돈되었고,벽에는 먼지가쌓인 짧은 대나무 빗자루 몇개가 걸려있는것이 보였다. 윤동주가 쓰던 방들은 말끔히 정돈되어 옛모습이 잘간직되어 보관 되어 있었다.

그가살던 생가의 방에 도달하기전, 오른쪽 마당으로 들어서면 뒤로는 새로단장된 전통식 한국담장과 과일나무들이 넓은 뒷마당까지 뻣쳐 있었고, 그앞에는 말끔한 평면 큰흰대리석에 윤동주가 연희전문 졸업반이되는 1941 년 자랑스런 학사모와 졸업식예복에 오른 손은 두권의책을 자랑스럽게 들고있는 예리한 청년 윤동주 의  모습과, 그가 1941년 11월 20일에쓴 “서시 序詩”가 상단에는 한글과 하단에는 한문으로 공을들여 정교하고 말끔하게 바위에 새겨져있다. 두뺨 과 코언저리 그리고 그의턱은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수없이 많은 지지자들이 다녀갔었든듯... 오른쪽 귓볼윗쪽의 이마서리와 왕눈섶은 많은 사람들의 손만짐의 흔적이 역력해 보였고, 아랫입술에는 아직도누군가 입마춤울 한듯한 빛갈이 바랜 입술연지의 흔적도 남아있었다. 많은방문객들은 이곳에서 예외없이 사진을 찍는다. 필자도 윤동주 선배에게 다가가서 일생처음으로 공손히 모자를벗고 허리굽혀 정중히 그분의 두눈을바라보며 인사를 드린후 함께 사진을 찍으며, 현실이 초월된 영혼의 대화를 잠시 나누어 보았다.

미국땅에서 멀고도 먼 중국땅에 직접가지고간 모교 연세대학교의 작은삼각깃발을 보여드리며 “선배님, 백두산 천지연에 최초로 모교의 삼각기를 날리고 인사드리려 이렇게 찾아왔읍니다”라고 두서없는 인사를드렸다. 그분은 본적도 없는 무명의 후학을 미소와 순수하고 고결한 웃음으로 반겨주었다. “선배님, 야만적 생체실험의 모르모트가되어 얼마나 아프신 육신과 사망의 고통을 당하셨읍니까? 늦게 찿아왔읍니다. 진작 찾아 뵈옵지못한것 용서하고 꾸짖어 주옵소서. 당신의 고귀한 희생으로 조국은 광복이되었읍니다. 그러나 한민족의 국가통일은 아직도 성취되지못했읍니다. 선배님의 모교는 연희전문에서 연세대학교로 이제 세계적인 굴지의 대학이되었읍니다. … 그리고 금년부터 모교 김용학총장께서 “윤동주기념사업회”를 통하여 선배님과 세상사이에 교량을 놓으려 한다고 하십니다. 이교류를 통해 세계의 평화와 자유를 한뼘씩 확장한다고 하셨읍니다. 기대해주십시요. ” 말씀을 드리고나니, 서서히 마음의 흥분도 가라앉았다.

 

서시 序詩 “죽는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도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바람에 스치운다.” 1941년11월 20일  [대리석 하단에는 “中國 朝鮮族 著名詩人” 이라고 각인되어있다]

생각컨데, 시인 윤동주는 부모로부터 겸손한 기독교신앙, 벼농사를하며 가꾸던  단촐한 집안에서 민족주의교육 이라는 전통적 가정교육을 전수한듯하다. “서시” 나 “또다른 고향”등의 주옥같은 시작품을 발표하므로 자기스스로를 한민족의 재단에 겸손한 제물로 바친것으로도 보인다. 그는 연세만이가졌던 출중한 교수들로부터 숭고한 민족주의 교육과 강의를 들으며, 민족문화의 소중함을 배웠을것이며, 독특한 문학적 세계관과 독립의지가 바탕에깔린 강렬한 민족적 역사의식을  터득하였는지도 모른다.

윤동주가 일본 유학시 야만적인 일본의 단말마적 광적행위를 체험한사실은 그가 1944년 치안 방해죄로 징역2년형을 받은 법원기록으로 온세상에 잘알려져있다.  그의 죄목은 전대미문의 “한글로 시를썼기” 때문이었다. “쉽게 씌어진시”에서 그는 이렇게 읊었다. “창밖에 밤비가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나라….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것은 / 부끄러운일이다”  라고 썼다. 이시를 발표한후, 한글로 시를썼다는 이유로 감옥에갇혔다. 지구상에 어느국가가 자기의 모국어로 시를 썼다하여 형사범으로 무모한 징역을 주는나라가 있는가를 묻고싶다. 극악잔인한 군국주의 섬나라  일본 뿐이었다. 타향살이하며 한글이라는 모국어로 “또다른 고향”을 고뇌로 희구하며 풍자했기 때문이었을까? 시인윤동주의 “또다른고향”은 대한민족의 독립이 이루어진, 그리고 현실적인 이념이 정착된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 땅이었는지도 모른다. 윤동주 그는  이렇게 외쳤다.

또다른 고향(1941) 고향에  돌아온날 밤에 내백골(白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속에 곱게 풍화작용(風化作用)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것이내가 우는것이냐 백골이 우는것이냐 아름다운 혼이우는것이냐.지조높은개는 밤을새워 어둠을짖는다. 어둠울 짖는개는 나를 쫓는 것일게다. 가자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가자 백골몰래 아름다운 또다른 고향에 가자.

대한민국은 시인 윤동주가 해방전 28세의 푸른나이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1945년 2월16일  생체실험의 “의혹”속에 생을 마감하였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난징대학살등 엄청난 일본군의 잔학으로2-30만이 도살당한  중국은 윤동주 시인을 일본경찰이 “살해” 했노라고 엄중히 선포한것이다: “의혹”과 “살해” 이것이 달랐다. 그의 유해는 북간도 용정동산의 중앙장로교회 묘지에 안장되었고 무덤앞에 “시인윤동주지묘” 라는 비석의 흑백사진 두장이 기념관에 있었다.

  

이번 윤동주시인의 생가방문중 안타까웠던일이 있었다: 첫째. 그가 1936년 3월 20일 쓴 “리별” 이라는  바위시 하나가 옆으로 쓸어져 있음을 보고 관리인에게 바로 세워달라고 애원하고 왔지만, 어찌되었는지 꿈속에서 쓰러진 바위시가 자주나타난다. 커피와 음료수및 생과자를 팔던 편의점과 생가 부억쪽에서 가장

가까운 남쪽에 있었던 바위였다. 둘째. 필자는 건축전문가가 아니다. 하지만 생가를 찿았을당시 생가의 지붕단의 상단과 추녀밑의 서까래의 각재(角材)가 비바람등 풍화로 구멍이나있었고,  깨어진 기와들 밑으로 현저하게 재목이 퇘색되어 썩어들어 가는것을 목격할수 있었다. 긴급 보수공사를 요하는 부분인것같았다. 셋째. 모교 연세대학교가 출판을 도울수 있다면 , 필자가 혼과영을 쏟아 윤동주시인의 모든시를 영어로 번역하여, 한국과 영어권 온세상에 알리고싶었다.

이제 생가 방문을 마치려한다. 인간 윤동주는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선배요, 독립운동가요, 우리 한민족의 정숙하고 순결한 희망이다. 그는 연세대학교가 배출한 가장 검소하고 고결한 시인으로 언제나 민족을사랑한 “해처럼빚나는” 잊을수없는 영원한 동문이다. May your soul rest in peace, and all your dreams be fulfilled on earth! 당신의 영혼이 평화로히 쉬시고, 모든꿈이 이땅에서 이루어지길 기원 하나이다!

그의생가를뒤로하고, 필자는 “또다른그의고향” 미국으로 돌아왔다.

김부운 (영문 61입)
[1968년에 도미유학. University of Houston 정치학석사. South Texas College of Law Houston법학박사.은퇴후 미국내 최대 한인 교회 라성 영락교회에서25년간 설교영어 동시통역 사역. LA통번역 대학원 교수.   미국California La Cañada Flintridge산골 집에살며 닭네마리도 키운다.]

  다음글 [특집] 연고전~ 결전의 날~!!!
2019-09-02

연세동문회보 콘텐츠 종료

연락처 및 저작권 표시

  • 연세대학교 총동문회
  • 연세대학교 총동문회
    03722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세로 50 연세동문회관 4층
    TEL: 02-365-0631~4    FAX: 02-365-0635
  • 사이트맵 | 개인정보처리방침
  • Copyright © 2018 Yonsei University Alumni Association.

페이지 로딩 이미지 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