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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이야기] 인물로 보는 연세 150년 ⑧ - 최동원 야구선수
등록일: 2022-05-12  |  조회수: 1,975

“떡라면 무러 가입시더.”
한국 야구사가 불멸이라는 수식어를 허용하는 유일한 선수 최동원 동문(경영 77입)이 우리 학교 재학 시절 백양로를 걸어가다 활짝 웃으면서 지나가는 여학생들에게 했다는 말이다. JTBC 첫 문화스포츠부장을 지냈고 최 선수와 동기인 손장환(신방 77입) LiSa 대표의 회고다. 그는 나의 대학 동기이기도 하다.

   이 글을 쓰기 위해 페이스북에 “최동원 스토리에 관한 제보자를 찾는다”고 올리자 우리 학교 한 동문은 “너무나 안타깝고 그리운 최동원 선수 이야기를 꼭 공유해 달라”고 댓글을 달았다. 역시 동문인 김정일(행정원 07입) SBS 선임아나운서는 전화를 걸어와 최 선수와 함께 야구 중계를 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 ‘전설의 무쇠팔’은 달변이기도 해 은퇴 후 야구경기 해설은 물론 사회도 보고 라디오 프로그램도 진행했다. 은퇴 후 야구판 언저리에서 서성이던 시절이다.

   최동원은 우리 학교 1학년 때 대학리그 결승전에서 성균관대 타선을 상대로 무려 16개의 삼진을 잡아냈다. 그해 실업팀 대 대학야구올스타전에서 그는 완벽한 투구로 대학 올스타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프로야구 출범 전이었던 그 시절 올스타전은 실업팀과 대학 야구 올스타들이 자존심을 걸고 세 번의 경기를 치렀는데, 지금 한국 시리즈의 성격을 띠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학교는 그해 최동원의 활약으로 대통령기, 대학야구선수권대회까지 우승, 4관왕의 위업을 달성한다.
그가 보여준 명장면 중 압권은 1984년 한국 시리즈이다. 당시 최강이었던 삼성라이온즈는 전략적으로 OB보다 만만한 최동원의 롯데자이언츠를 한국 시리즈 상대로 픽했다. 롯데 강병철 감독은 “1, 3, 5, 7차전에 최동원을 선발로 내세워 4승3패로 우승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잔혹한 발상에 최 선수가 반발하자 강 감독이 말했다.
“동원아, 우짜노 … 여까지 왔는데….”
   최동원이 불쑥 내뱉었다. “알겠심더. 마, 함 해 보입시더.” 감독은 1, 3, 5, 7차전에 그를 내보냈고 2승3패로 수세에 몰리자 6차전 5회에 구원으로 최 선수를 마운드에 올렸다. 감독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는 결국 롯데에 우승을 안겨줬다. 최동원은 여전히 4승, 4완투, 40이닝 등 10개의 한국 시리즈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기록은 깨지라고 있는 것이라지만, 영원히 깨지지 않을 대기록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다섯 살 아래로 고려대 출신인 국보급 투수 선동열 전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은 최 동문을 라이벌이자 선배로서 존경했다고 한다. 최동원 역시 라이벌인 그를 후배지만 존중했다. 이들은 세대가 달라 고교·대학 시절엔 맞대결을 할 기회가 없었다.
   세 번에 걸친 두 선수의 선발 맞대결을 그린 영화 ‘퍼펙트 게임’(2011년)에서 최동원 역은 조승우가 맡았다. 그러나 이 두 레전드는 나란히 앉아 이 영화를 보지는 못했다. 석 달 전 최 선수가 53세에 대장암으로 세상을 등졌기 때문이다.
그 1년 전 항암 치료 중이던 최동원은 한 방송 인터뷰에서 “1, 3, 5, 7차전 선발로 뛰는 상황이 다시 닥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자 퀭한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아마 또 던질 겁니더.”
그는 85~87년에도 시즌 내내 완투 경기를 이어갔다. 요즘은 상상하기도 힘든 악전고투이다. 지난해는 이 위대한 선수의 10주기였다.

그가 속한 팀은 언제나 원맨 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동원 팀. 우리 학교도, 경남고도, 롯데도 그랬다. 경남고 시절 그는 전무후무한 17이닝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우리 학교 재학 시절 그는 연세의 에이스이자 국가대표 에이스였다. 감독은 물론 선수들도, 팬들도 그만 믿다시피 했다. 그의 투구 폼은 용틀임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역동적이었다. 오만에 가까운 특유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그는 공격적인 투구를 했다. KBO 역사상 최고의 마구 소리를 들은 폭포수 커브도 던졌지만, 그의 공은 말 그대로 돌직구였다. 홈런을 맞으면 다음에 그 선수와 상대할 때 ‘칠 테면 쳐 보라’는 식으로 같은 코스로 던졌다. 이번에 또 치면 너의 실력을 인정하겠다는 투였다.
   그는 공을 던질 때 루틴이 있었다. 송진가루, 신발끈, 겉양말, 안경, 모자챙을 차례로 만진 후 투구를 했다. 2015년 그의 어머니 김정자 여사가 롯데 자이언츠와 kt wiz의 한국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이 루틴과 아들의 투구 폼을 재현했다.

야구밖에 몰랐던 그는 스타답지 않게 수수했다. 경기장 밖에서는 보통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사석에서는 소탈했고 겸손한 타입이었다. 술·담배를 가까이하지 않았고 고기도 거의 안 먹었다고 한다. 58년 개띠인 그는 특히 보양을 하라고 개소주를 보내오면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운동선수가 심지어 “찬 물에 밥을 말아 김치에 싸먹으면 그게 보양식”이라고 말했다.
   그런 그가 주 원인이 서구식 식습관으로 알려진 대장암으로 떠났다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다. 롯데에서 트레이드된 후 겪은 오욕의 세월과 무관치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무쇠팔’, ‘철완(鐵腕)’, ‘황금의 오른팔’, ‘비운의 선수’. 최동원을 수식하는 말들이다. 그러나 그가 프로 선수로 뛴 날들은 고작 8시즌에 불과하다. 1982년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하느라 남들보다 1년 늦게 롯데에 입단했고, 선수협의회 결성을 주도했다고 89년 삼성으로 트레이드됐다. 결국 2년 만에 은퇴했다. 롯데에서도 불과 6년 뛰었다. 손장환 전 JTBC 문화스포츠부장은 “선발 124경기 중 65%(81게임)를 완투(15완봉)한 최동원을 나는 영웅이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그는 프로야구 선수들의 권리와 복지를 증진하기 위해 선수협의회 결성을 주도했다. 당시 해태 타이거즈 김대현 투수가 불의의 사고로 떠난 후 무명 선수들의 복지 문제에 눈을 뜬 것이다. 스타선수인 그가 명예욕을 부렸다는 시각도 있었다. 이런 시선에 대해 그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같이 운동하던 선수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는데 도울 길이 없었다. 연습생 선수들의 최저생계비, 선수들의 경조사비, 연금 등 최소한의 복지제도를 만들려면 선수협이 필요했다. 나는 연봉 1억 원을 받는 선수였다. 그 돈이면 당시 강남의 아파트를 장만할 수 있었다.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선수협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명예욕이라기보다 나름의 의협심의 발로였던 셈이다. 선수협 결성은 구단들의 강력한 반발로 수포로 돌아갔다. 이 일로 그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경남고 출신으로 롯데에 한국 시리즈 우승의 영광을 안긴 그로서 다른 팀의 유니폼을 입는다는 것은 치욕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프로야구에 대해 회의를 느꼈고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그가 영면하기 직전인 2000년 마침내 프로야구선수협의회가 결성됐다.

영화 ‘파이란’의 포스터 카피를 패러디하면 “세상은 그를 불멸이라 하고 야구계 기득권은 그를 불온하다 했다”고 할까?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간 그는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최고이다. 마운드에 오를 때마다 최고답게 던지려 최선을 다했다.”
2014년 한국판 사이영 상인 최동원 상이 만들어졌다. 해마다 KBO 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인 투수에게 주어진다.

- 이필재(신방 77입) 한국잡지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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