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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이야기] 인물로 보는 연세 150년 ⑦ - 최인호 소설가
등록일: 2022-05-12  |  조회수: 1,104

“내가 쥔 펜으로 사회를 변혁할 수 있다고 작가 스스로 생각하는 건 아주 위험합니다.”
2013년 가을 영면한 최인호 소설가는 “작가는 고독해야 하고 자기를 스스로 유폐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작가는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지 문제에 대한 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젊어서는 청년문화의 상징으로 대중적 인기를 누렸고 마흔둘에 가톨릭에 귀의한 후로는 역사 소설, 종교 소설로 문학적 지평을 넓힌 그는 우리 학교 영문과(64입)를 나왔다. 1993년 국어국문학과 객원교수를 지냈고, 작고한 이듬해인 2014년 자랑스러운 연세인상을 받았다. 그에 앞서 2006년 연문인상을 탔다. 아들 성재 씨(철학 93입, 대학원 신방과 98입)도 우리 학교 동문이다.

최인호는 무엇보다 1970년대에 거의 유일했던 전업 소설가였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소설가 이문열은 “내가 등단한 1970년대 후반 글만 써서 밥을 먹는 소설가는 최인호 선배뿐이었던 것 같다”고 회고한 일이 있다.

최 동문은 이상문학상·동리문학상도 받았지만 특이하게 한국가톨릭문학상(1998년)과 현대불교문학상(2003년)을 함께 받은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생전에 “가톨릭에 귀의한 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지만 가톨릭 신자로서 불교에 대해서도 개안했다”고 밝힌 일이 있다.
<나는 아직도 스님이 되고 싶다>는 가톨릭적 불교주의자를 자처한 그의 유고집이다(‘나는 아직도 스님이 되고 싶다’는 에세이를 발표했을 때 그는 가톨릭 신자로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유림>엔 유교의 가르침을 소설 형식에 담았다. 이렇듯 종교의 틀에 갇히지 않았던 그는 종교에 귀의한 후 “작가는 글을 통한 수도자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최인호는 시나리오도 10편 이상 썼고 백상예술대상·대종상 시나리오상도 받았다.
그에 앞서 <걷지 말고 뛰어라>란 영화로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영화 <고래사냥>의 주제가인 ‘고래사냥’의 가사를 직접 썼다. 그에게는 여러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우선 서울고 2학년 때 단편 <벽구멍으로> 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가작 입선, 최연소 신춘문예 당선 작가 소리를 듣는다. 최연소 신문 연재 소설가, 작품이 가장 많이 영화화된 소설가이자 표지에 자신의 사진이 실린 최초의 작가이기도 하다. 대부분 소설인 2백82권의 책을 냈고, 30여 편의 소설이 영화화됐다. 스스로 꼽은 대표작은 출세작인 <별들의 고향>, 불교 소설 <길 없는 길>, 진정한 상인정신을 다룬 <상도> 등이다. 1973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별들의 고향>으로 그는 28세의 약관에 유명 작가 반열에 올랐다.
고2의 신춘문예 당선작 <벽구멍으로>에 대해 “신선한 문장이 돋보인다”고 평한 심사위원 황순원은 막상 최인호가 시상식장에 교복을 입고 나타나자 속았다는 표정이었다고 한다. 황순원은 훗날 최인호가 스물다섯에 동갑나기 우리 학교 동문 황정숙(교육 64입)과 결혼할 때 주례를 섰다.

최 동문은 또 <가족>이라는 연작 소설을 월간 샘터에 연재했다. 국내 잡지 사상 최장기 연재로 35년여 동안 4백회 썼다. 그는 가족은 작가에게 중요한 화두라고 주장했다. “어디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인생이라는 이상한 여정에서 가족은 신비한 존재”라고 말했다.
다작을 한 그는 “피임을 안 해 나는 수태하는 대로 작품을 낳아 그렇다”고 털어놓은 일이 있다. 출간을 한 후엔 자신의 작품을 읽어보지도 않았고,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앞으로 태어날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가 자기 작품을 읽지 않은 건 어쩌면 문장의 매너리즘에 빠지는 걸 스스로 경계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과거에 쓴 문장을 다른 작품에 다시 쓰는 동어반복이 작가로서 가장 무서운 일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2001년 조선 최고의 비즈니스맨이자 국제 무역상이었던 임상옥을 재현한 팩션 소설 <상도>로 그는 제2의 전성기를 맞는다.
<상도>는 드라마로도 제작돼 빅히트를 했고 한국 사극 최초로 해외에 수출됐다.
역사학자 문일평이 쓴 임상옥 평전에서 처음 임상옥을 접한 그는 한 야담집에 실린 거상 임상옥 이야기를 읽고서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다. 임상옥과 계영배(戒盈杯) 이야기였다. 계영배는 술이 3분의 2가량 차면 옆의 구멍으로 새게 만들어진 잔이다.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최인호는 “기대치의 70%일 때 자족하는 것이 최고의 성취”라는 말을 남겼다.
<상도>를 구상할 당시 그는 윤승운이 그린 만화 ‘한국의 위인’ 임상옥 편을 보고 그에게서 임상옥에 관한 야사 등 방대한 자료를 넘겨받았다. 최인호는 훗날 ‘가족’에서 각별한 고마움을 두 살 위인 이 만화가에게 공개적으로 표했다.
“그는 상도를 낳은 자궁이자 태반이었고, 창작혼의 심지에 불을 지핀 부싯돌이었다.”

서울 사대문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 도시적 감수성을 지닌 그는 복식 고증의 어려움 등으로 본래 역사소설엔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KBS 일로 일본에 남은 백제문화를 현지에서 리포트한 것이 역사소설에 입문하는 계기가 됐다.
생전에 그는 2000년 전 목수로 태어나 그를 믿건 안 믿건 사람들을 들었다 놨다 한 예수의 생애를 소설화하고 싶어했다. 2005년 한 인터뷰에서 10년 전부터 작품 구상을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런 그를 난치병인 침샘암이 덮쳤다. 2008년의 일이다. 평생 육필로 글을 쓴 그는 항암제 탓에 손톱이 빠지자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에 골무를 끼고 썼다.
악필로 통해 신문에 소설을 연재할 땐 그를 전담하는 교열기자가 있었다고 한다. 악필로 소문난 건 어쩌면 그가 만년필로 워낙 빨리 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단편 <타인의 방>은 밤새 써 다음 날 아침에 탈고했다고 한다.

대중성 짙은 순수문학을 한 그에 대해서는 호스티스 소설을 쓰는 대중 작가라는 평판도 있다. 1970년대 유신체제에 저항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받았다. 그래서일까, 그는 “늘 김지하에게 미안했다”는 글을 쓰기도 했다.
그런 그도 젊은 대학생들이 많이 부른 노래 ‘고래사냥’ 때문에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고래가 뭘 의미하느냐고 물어 젊은이의 자유라고 답했다. 그러자 지금 대한민국에 자유가 없다는 말이냐고 따졌다. 이 사건에 대해 그는 어디 가든 잘 웃기는 편이라 그때 심하게 맞지는 않았다고 털어놓은 일이 있다.

그의 부친은 평안도 사람이다. 서울 태생이지만 그는 아버지의 호방한 평안도 기질을 물려받았다. 최씨가 앉은 자리엔 풀도 안 난다는 이야기가 있다. 더욱이 그는 곱슬머리에 옥니였다. 대륙적 기질에 상종 못할 고집쟁이의 세 조건을 모두 갖춘 셈이다. 불세출의 작가이기도 했지만 그는 자기 작품에 대한 자존심이 강했다. 항암 치료를 받던 시절엔 머리카락도 잘 안 빠졌다고 한다. 그런 그도 병마는 이기지 못했다.

생전의 한 인터뷰에서 그는 “작가는 저주 받은 존재”라는 말을 남겼다. “지식인도 아니고, 작가는 그 시대에 저주 받은 영혼을 지닌 말의 동냥꾼입니다.” 문단과 거리를 뒀던 그는 문단이 조폭 조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기 파워를 키우려는 문단 조직은 작가들에게 치명적인 독이 된다고 주장했다. 작가에게 가장 무서운 건 당대의 칭찬이라고 한 그는 “내가 한 일에 대해서는 사후에 평가해 달라”는 말을 생전에 남겼다.

- 이필재(신방 77입) 한국잡지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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