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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이야기] 세상을 바꾸는 연세인들 ⑭ - 김성수 성공회 우리마을 촌장(대주교) - 1
등록일: 2021-12-07  |  조회수: 1,627

“언제 가장 행복하셨습니까?”
임인년 새해에 우리 나이로 아흔셋이 되는 노신부 김성수 성공회 대주교에게 물었다. 이런 즉답이 돌아왔다.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매일 매일 행복합니다.”
그는 대한성공회 신부로서 초대 한국관구장 대주교를 지냈고 65세에 정년퇴직한 후 8년 간 성공회대 총장으로 있었다. 그 후 2000년에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고향 땅에 ‘우리마을’을 설립해 자칭 ‘촌장’으로 있다. 성공회 우리마을은 발달장애인들의 자활 공동체이다. 유기농 콩나물을 기르고 전자기기 부품을 조립한다. 요즘은 원두커피를 내릴 때 남는 찌꺼기인 커피박으로 연필도 만든다. 커피의 부산물을 필기구로 리사이클링하는 것이다. 환경부는 국내에서 버려지는 커피박이 연간 10만 톤 이상일 것으로 추산한다.
“커피박 연필 사업은 올해 시작했어요. 커피박이 단단하게 뭉치게 하는 성분도 천연식물에서 추출한 것이라 나중에 땅에 묻혀도 자연분해됩니다. 여전히 우리마을의 주수입원은 매출액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콩나물이죠.”
김 촌장은 성공회대 전신인 성미가엘신학원 재학 중 우리 학교 신과대를 1년 간 다녔다. 우리 학교 법인 이사를 10년 지낸 이력도 있다. 부인인 김후리다 여사가 우리 학교에서 영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그의 아들은 우리 학교 체육교육학 박사이다. 그는 우리 학교 명예 신학박사이다.
“저는 엉터리 박사지만, 제 아내는 제대로 공부한 영문학 박사예요.”
우리마을이라는 이름은 ‘너’와 ‘나’를 떠나 발달장애인과 ‘우리’가 되자는 뜻으로 지었다.
성공회는 한국에서는 작은 교단이지만 발달장애인들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생애주기 동안 생계 걱정, 집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돌보는 일을 하려 한다. 김 촌장은 젊은 날 국내 최초의 발달장애인 특수학교인 ‘성베드로학교’를 설립해 초대 교장을 지냈다. 발달장애인들의 일터인 우리마을이 생기기 전엔 이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 갈 곳이 없었다. 그의 부인 김후리다 박사는 의정부에 영유아특수학교인 희망학교를 세웠다. 김 촌장은 마지막으로,우리마을에서 60세에 정년퇴직한 발달장애인들이 여생을 보낼 발달장애노인 양로원을 지으려 한다. 이 양로원이 만들어지면 발달장애인의 생애주기별 복지가 완성되는 셈이다. 김 촌장 인터뷰에 동석한 이대성 우리마을 원장 신부는 우리마을에 여태 김 대주교의 신명(시몬. 신명은 가톨릭의 영세명에 해당)을 딴 곳이 없어 이 마지막 시설을 ‘시몬의 집’으로 부르기로 했다고 귀띔했다. 김 촌장은 우리마을에서 일하는 발달장애인들을 친구라 부른다.
“발달장애인 양로원 설립은 저의 버킷 리스트입니다. 그런데 정부의 장애인 탈시설-커뮤니티 케어 정책 흐름과 맞물려 시설 설립에 어려움이 있어요. 정책의 큰 흐름을 수긍하지만, 아직은 과도기라 나이가 꽉 차 우리마을을 떠나는 ‘친구들’이 갈 데가 마땅치 않아요.”

- 콕 찍어서 핵심 쟁점이 뭡니까?
“발달장애인은 누군가 대변해 주지 않으면 스스로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노인발달장애인은 장애와 조기 노화라는 이중고를 겪습니다. 이들은 노인시설에서도, 장애인시설에서도 주변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의 탈시설-커뮤니티 케어 정책으로 인해 신규 시설 설립의 길이 막혀 있는데, 우리가 만들려는 발달장애노인 양로원도 마찬가지예요. 시설과 지역사회를 꼭 대립적 관계로만 볼 건 아닙니다. 과도적으로 지역사회의 한 주체로서 순기능을 할 수 있는 특화된 시설의 필요성을 정부가 인정해 주셨으면 합니다.”
발달장애인은 40대 중후반이면 상당수가 노인성 질환을 앓는다. 이들은 장기요양 등급을 받아 일반 양로원에 들어가더라도 발달장애 탓에 다른 노인들에게서 배제 당하고 차별을 받기 일쑤라고 한다.
김 대주교보다 여덟살 연장으로 2009년 영면한 가톨릭의 고 김수환 추기경은 노년에 스스로 바보를 자처했다.
“그분이 ‘나는 바보다’라고 하시는 바람에 바보 자리를 빼앗겨 저는 엉터리라고 합니다. 사실 평생 엉터리로 살았어요.”
김 추기경은 1987년 6월 항쟁 당시 명동성당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며 농성 중인 대학생들을 연행하려는 전두환 정권 측에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 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가라”고 말했다. 김 대주교는 6월 항쟁 때 성공회 서울교구장이었다. 당시 서울대성당에서 전두환 정권이 기도한 호헌 철폐를 위한 미사를 집전했다. 경찰을 피해 숨어든 시민사회 대표와 학생들에게 숙식을 제공했고 주교 집무실을 대책본부로 쓰도록 내줬다. 이들은 대신 매일 아침미사에 참석해야 했는데, 일반 신자로 위장해 경찰로부터 보호하려는 ‘신부들의 잔꾀’였다.
김 대주교는 오래 전 가수 조영남, 윤형주, 배우 윤여정 등 쎄시봉 멤버들과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이들은 젊은 날 자주 김 대주교 사택을 찾아 밤새 놀았다. 그런데 정작 이들에게는 미사에 참석하라고 권하지 않았다. 조영남은 중앙선데이 ‘남기고 싶은 이야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가 술타령과 밥타령으로 밤을 꼬박 지새고 아침이 되면 일요일이 틀림없는데 신부님은 우리더러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 한마디가 없었다. 이래라저래라 푸시가 없었다. 너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땐 왜 그랬느냐고 김 대주교에게 물었다.
“억지로 나가라고 한다고 신자가 되나요? 신자가 되는 건 다 때가 있고, 뭐 안 되어도 할 수 없고요. 스스로 깨달아 귀의할 때 오래갑니다.”
인터뷰 차 처음 만났지만 나는 과거 사진으로 볼 때마다 김 촌장이 참 준수하게 생겼다고 생각했었다. 영국 유학파이기도 한 김후리다 박사는 영국 여자이다. 그래서 유학시절에 만난 줄 알았다.
“결혼 전 아내가 일본에서 성공회 선교사로 사역을 했습니다. 제가 일본에 성공회 국제회의 차 갔다가 거기서 만났는데 나한테 반했죠.”
서울교구장 시절 그는 주교 월급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신자들과 대학생들에게 밥을 자주 샀다고 한다. 성공회대 총장 시절엔 판공비를 전액 장학금으로 돌렸고, 월급은 월급대로 학생들과의 회식비 등으로 썼다. 그 바람에 김 후리다 박사가 강의 수입 등으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고 한다.
이들 부부는 아들·딸 남매를 뒀다. ‘원조’ 다문화가정 출신인 그의 아들은 올해 쉰둘로 여의도중 재학 시절 다른 학교 학생들과 패싸움을 벌이곤 했다. 그가 나서면 이 싸움이 평정이 됐다고 한다. 주교 시절 이 일로 김 대주교는 걸핏하면 학교에 불려다녔다.
“교무실에 들어서면 바로 용무를 알아차리고 다들 외면하곤 했어요. 담임선생님도 참 난감해 했죠. 그랬던 아이가 지금은 직장에 잘 다닙니다. 제 자리로 돌아와 잘사는 거보면 모든 건 시간이 해결해주는지도 모릅니다.”

-진영 갈등, 세대 갈등 등 우리 사회에 갈등이 심각합니다. 그런가 하면 원로 없는 시대, 시니어들이 대접 못 받는 시절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시니어부터 스스로 겸손해지고 남을 높이려 노력해야 합니다. 교사가 학부모에게서 뺨 맞고 아파트 경비원이 입주민에게 폭행당하는 세상을 방치해선 안 됩니다. 우선 내년 대통령선거에서 누가 당선되든 대통령을 높여줬으면 해요.”

이필재(신방 77입) 한국잡지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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