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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이야기] 세상을 바꾸는 연세인들 ⑬ - 표재순 중랑문화재단 이사장(전 문화융성위원장) - 2
등록일: 2021-11-11  |  조회수: 1,698

드라마 PD로 30년 몸담은 방송계를 떠난 후 모교 교수를 지낸 표재순 동문(사학 56입)은 그 후 장관급인 대통령 직속 문화융성위원장을 지냈다. 그는 지금 우리 문화의 융성은 한국인의 DNA와 고유의 전통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인은 남다른 모험정신 내지는 진취적인 탐험정신이 강합니다. 그런데 비로소 문화의 힘이 국력인 시대를 맞지 않았습니까?”

- K 드라마, K 팝을 비롯해 K 시리즈가 세계적으로 각광 받고 있습니다.
“K 드라마는 가족애, 효, 생명 존중 등 국경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주제를 다룹니다. 우리 문화 저변의 보편성을 드라마에 담아낸 것이 주효했다고 봐요. 한국 문화 콘텐츠의 잠재력은 거의 무한하다고 봅니다. K 시리즈의 원조는 단연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이에요.”
역사를 전공한 그는 10년 전 우리 근대사 주요 인물의 일대기를 극화한 ‘민족혼 부활 프로젝트’를 주도해 연출자로서 우리 동문인 윤동주 시인(‘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을 비롯해 안중근 의사, 월남 이상재 선생 등의 삶을 무대에 올렸다. 해외 순회공연도 했는데 티켓을 팔지 않고 전 좌석을 초대권 관객으로 채웠다.
“우리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죠. 국사는 고등학교 1학년만 필수 과목이고, 국가고시 과목으로서도 선택이죠. 평생 연극을 해 온 사람으로서 연극을 도구로 자라나는 세대에게 우리 역사에 대해 역사상의 인물을 중심으로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모르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어렵다고 봐요.”
그는 공연 당시 몇몇 대학생에게 민족의 선각자로 장례식에 20만 명이 참석한 월남 선생을 아느냐고 했더니 “탈북한 사람이냐”고 반문하더라고 했다.

- 살아오시면서 승승장구만 하신 거 같은데 크게 좌절한 적도 있나요?
“88 올림픽 후 안티 올림픽 바람이 불면서 친정부파로 몰려 20년 몸담은 MBC를 떠나야 했습니다. 제가 뽑은 후배들에게 등 떠밀려 퇴사한 후 ‘다시는 방송 안 한다’고 미국으로 떠났죠.”
이순을 앞두고 맞은 질풍노도의 시절이었다.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SBS 사장이었던 윤세영 SBS미디어그룹 창업회장이 그를 불러들였다. 안 돌아간다는 그에게 전무 자리를 제안했다.
“‘전무’면 아무것도 없는 거네요 했더니 웃더라고요.”
SBS가 태어난 산실은 요원이 다섯뿐인 사무실이었다.
2002년 월드컵 전야제 총감독을 맡았을 땐 비가 억수같이 내렸고 리허설까지 한 서울시향 단원들이 연주 전 퇴장을 했다. 그 바람에 생방송 도중 20분 간 공백이 생겼다. 그에 앞서 주최 측에 우천에 대비해 천막을 쳐달라고 그가 그날 아침까지 요구했지만 경비 문제 등으로 수용이 안 됐다.
“저로서는 일생일대의 실수였죠. 이 일로 공황장애까지 겪었습니다.”
국가적인 주요 행사의 단골 총연출자였던 그로서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65세 때의 일이다.
미수를 바라보는 그는 여전히 현역이다. 지난해 여름부터는 중랑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관내의 망우역사문화공원을 ‘온리 원’의 명품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포부다.
“문화예술적 관광지로 만들 겁니다. 여기엔 유관순 열사, 시인 한용운, 화가 이중섭,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였던 조봉암, 개화기에 종두법을 보급하는 등 감염병 퇴치에 앞장선 예방의학자이자 의학교육자 지석영 선생, 시인 박인환, 가수 차중락 등 60여 명의 유명인사들이 묻혀 있습니다.”

- 버킷 리스트가 뭔가요?
“망우역사문화공원을 명품으로 만드는 한편 강원도 고성 땅에서 바그너 페스티벌과 셰익스피어 축제를 여는 겁니다. 고성군은 바그너오페라축제극장이 있는 독일 바이로이트시와 이미 몇 년 전 자매결연을 했습니다. 국내에 노벨문학관을 만드는 꿈도 꿉니다.”
그가 모교 영상대학원 교수로 있을 때 함께 근무한 모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윤태진 원장은 지난 호 연세동문회보 기사를 접한 후 그에 대해 “호기심 많고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한 분”이라고 귀띔했다(커뮤니케이션대학원은 영상대학원의 후신이다). 일례로 표 동문은 모교 노천극장에 반구 형태의 개폐식 돔 지붕을 씌우면 도심에서 가까운 대형 극장으로 연중 활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현재는 특수대학원 등의 수업으로 야간에 사용을 못합니다. 결국 돈 문제죠. 기업을 끌어들여 기부채납을 받는 길이 있습니다. 또 음향까지 생각했다면 노천극장 리모델링 때 돌이 아니라 나무 계단을 깔았어야 해요.”
오래 전 신촌의 H대가 재정난으로 매각설이 돌았을 땐 미대가 강한 이 대학을 인수해 우리 음대와 합쳐 예술대로 개편하고 산하에 연극영화과를 만들자고 제안을 했었다고 한다.

- 모교 교수로 7년 재직하셨고 그 후 배재대학교 한류문화산업대학원에도 계셨는데, 교육은, 대학은 어떻게 바뀌어야 합니까?
“교육의 핵심은 자유와 자율이라고 봅니다. 세계적으로 자유롭고, 공부가 재밌는 ‘신바람 교육’을 지향해 학교라는 ‘감옥’을 부숴야 합니다. 그러자면 교육 개혁이 아니라 교육 개벽을 해야 돼요. 대학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교육부는 존치하더라도 교육 권위주의는 청산해야 합니다. 교육부는 대학의 총장 선출에 개입하지 말고, 대학은 본교 출신 교수의 비율을 낮춰야 합니다.”
그는 공연영상학부 초빙교수를 지낸 배재대에 한류문화산업대학원을 만들어 석좌교수를 지냈다. 75세 때 일이다.
연극과의 첫 인연은 왕십리 무학초등학교 4학년 시절 맺었다. 학예회 때 동명성왕이라는 연극에서 궁궐지기 엑스트라를 맡았는데 대사 없이 한 시간 동안 창 들고 서 있었다고 한다.
연극에 빠져 산 우리 학교 재학 시절엔 전국 도보여행을 다녔고, 바위도 탔다. 신촌 캠퍼스 밖 추억의 장소로는 굴다리 개천 옆에 있던 어묵튀김 국수집과 신촌로타리 파출소 옆 돌섞어집을 꼽았다.
“당시엔 거의 번역극을 했는데 연극 연습 후 토론과 술판이 벌어지던 뒤풀이 장소였죠.”

- 어쩌다 원로 없는 시대가 됐습니다.
“저도 교회 원로장로지만, 지금은 종교계에도 원로가 없습니다. 혼돈의 시대, 남루한 세상이에요. 가치가 전도되고 정신세계가 빈곤해진 탓이죠. 우리 나라가 경제와 문화 면에서는 대단한 나라가 됐는데 정치적 갈등이 너무 심해요. 진영을 떠나 정치 하시는 분들이 좀 잘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정치권으로부터 영입 제의도 받으셨겠어요?
“정치는 ‘지읒’ 자 근처도 가지 않았습니다. 문화융성위원장도 소신껏 딱 1년만 했어요.”

- 나이 들어 꼰대 소리 듣지 않으려면, 나아가 꼰대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처신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흰머리와 주름은 노인의 심벌이죠. 그러나 나이 먹었다고 다 어르신이 되는 건 아닙니다. 나이를 잊은 채 꾸준히 배우고 교양과 지성을 갖추려 노력해야죠. 또 아름다운 황혼을 누리려면 너그럽고 베풀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단순하고 소탈하게 살아야 돼요.”
그는 사후에 시신 기증을 하려 했지만 고령이라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했다. “녹내장·백내장을 앓은 탓에 안구 기증도 못합니다. 남에게 무언가 줄 수 있다면 행복한 겁니다.”

이필재(신방 77입) 한국잡지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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