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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이야기] 세상을 바꾸는 연세인들 ⑬ - 표재순 중랑문화재단 이사장(전 문화융성위원장) - 1
등록일: 2021-10-12  |  조회수: 1,884

“재미와 감동입니다. 연극이든 드라마든 보는 사람도, 만드는 사람도 재미와 감동을 맛볼 수 있어야죠.” 한국을 대표하는 연출가이자 독보적인 문화예술 기획 전문가인 표재순 전 문화융성위원장은 자신의 연출 철학에 대해 “공연마다 관객들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감동을 안겨주려 했다”고 말했다. “만 원짜리 공연이면 관객이 2~3만 원어치는 뽑고 돌아서야죠. 만 원 주고 1천원밖에 못 건지는 공연도 있습니다만….” 현재 중랑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표 전 위원장은 우리 학교 사학과 출신(56입)이다. JTBC의 전신인 TBC(2년), MBC(20년), SBS(8년)에서 만 30년간 드라마 PD로 일했고, 마지막 4년간 SBS프로덕션 사장을 지냈다. 1999년부터 7년 간 우리 학교 신문방송학과와 영상대학원의 교수로 있었다.

- 공연예술에서 이른바 예술성과 대중성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나요?
“예술하는 사람들의 영원한 숙제입니다. 재미와 감동이 있을뿐더러 완성도 높은 웰메이드 드라마를 만들어야죠.” 그는 우리 학교 연세극예술연구회 출신이다. “처음엔 배우가 되고 싶었고 무대에도 섰어요. 당시는 ‘애수’의 로버트 테일러, ‘자이언트’의 록 허드슨 같은 미남들의 시대였죠. 그런데 저는 키가 작고 코는 납작한 데다 목소리가 짱짱했어요. 그래서 배우의 꿈을 접었죠. 3학년 때 윌리엄 홀든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긴 동명의 미국 영화가 원작인 ‘제17 포로수용소’를 첫 연출 했습니다.” 당시 극예술연구회 연극은 해마다 두 번 봄가을에 리모델링하기 전의 노천극장에서 했다고 한다. 많을 땐 관객이 8천명가량 몰려 백양로가 미어터지다시피했고 특이하게도 일간지에 연극평이 실렸다고 했다. ‘연극이 끝난 후’ 노천극장 잔디엔 관객들이 남긴 신문지 등 종이 조각들이 흩날렸다. 연극 공연의 열기가 식을 즈음 “광대들의 숲속의 향연이 시작됐다”고 그가 회상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윤동주 선배의 서시를 시작으로 시들을 낭송하고,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의 아리아 ‘별이 빛나건만’ 등을 요즘 말로 ‘떼창’ 했어요. 노래하고 춤 췄고, 새벽이 되도록 트링켄(trinken·마셔라), 트링켄 하며 이야기꽃을 피웠죠. 한마디로 낭만의 시대였습니다.” 1960년대 대강당 개관 공연 연출도 맡았다. 30분 만에 정전이 되는 바람에 결국 촛불을 켜야 했고 공연은 그야말로 엉망이 되고 말았다고 회고했다. 연극에 미쳐 군 입대도 미뤘고 결국 서대문로터리서 당한 불심검문 끝에 논산훈련소로 직행했다고 했다. 

- 그 시절 캠퍼스에서 추억의 장소가 어디입니까?
“우리 학교의 상징이라고 할 백양로와 언더우드 동상, 채플 장소이자 공연장이었던 노천극장, 휴식과 사색을 위해 찾은 청송대 등입니다.”

- 우리 학교에 진학한 특별한 동기나 계기가 있었습니까?
“배재고 1학년 때 <배재 60년사> 편찬을 위해 백낙준 총장님의 특별 배려로 일찍이 우리 학교 도서실을 드나들었습니다. 그때 담쟁이 덩굴로 뒤덮인 석조 건물, 개나리와 진달래꽃, 자색 라일락의 짙은 향기, 초여름의 신록과 가을의 단풍 숲, 흰 눈 덮인 겨울의 캠퍼스에 반했죠. ‘여기가 장차 내가 뛰어놀 마당이구나’ 싶었습니다.” 그는 지금은 본관 건물로 사용되는 당시 문과대 건물 정면 상단에 돌로 새긴 태극 문양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일제 강점기에 잠복할 수밖에 없었던 애국심의 발로였다고 봅니다.” 사학과 은사인 이광린 교수는 그가 대학원에 진학해 교수가 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연극에 빠져 살던 그는 “딴따라 할래요”하고 뿌리쳤다. 방송계를 떠나 서울예술대학에 몸담은 그는 1999년 우리 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부임한다. ‘딴따라’로 성공해 박사학위 없이 모교 강단에 선 것이다. 그 후 영상대학원(현 커뮤니케이션대학원) 설립에 참여했고, 퇴임 때까지 이 대학원 소속으로 있었다. 그는 ‘연세학’을 만들자고 주장한 일이 있다고 했다. “연세인이라면 섭렵해야 할 연세의 역사와 정신을 가르치는 과목이죠. 1학년 1학기 교양과목으로 만들어 채플처럼 패스·논패스 방식으로 이수케 하자는 아이디어였는데 수용이 안됐습니다.”

- 다시 대학생 시절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하시고 싶습니까?
“사학과에 다시 들어가 개화기부터 해방 전후기까지의 최근세사를 공부하고 싶습니다.”

- 그동안 연출하신 작품 중 대표작으로 무엇을 꼽으시나요?
“허준의 동의보감을 다룬 ‘집념’, ‘대원군’, ‘타국’, ‘간양록’(이상 TV 드라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옛날 옛적 훠어이 훠어이’, ‘천사여 고향을 보라’(이상 연극), ‘피터팬’(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록오페라) 등입니다.”

- 사극을 많이 연출하셨는데 사학 전공하신 게 도움이 됐겠습니다?
“사극 전문이었지만, 대학 때 공부를 열심히 안 해 사극 만들면서 공부했습니다.” 표 동문은 88서울올림픽 당시 개폐회식 총연출 및 제작단장을 맡았었다. 1993년 대전 엑스포 개폐회식 총연출, 2002년 월드컵 전야제 총감독도 했다. 초대 세종문화회관 이사장도 지냈다. 

- 한국의 문화·예술에 어떤 족적을 남겼다고 생각하십니까?
“뭐, 족적이랄 게 있나요? 다만 열심히 했고, 앞으로도 자만하지 않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 아이디어가 많으신데 영감의 원천이 뭔가요?
“호기심과 열정입니다.”

- 연출가 지망생들에게는 어떤 조언을 주시겠습니까?
“첫째, 긍지를 갖고서 하고 싶은 작품을 당당하게 만들어 보세요. 남들 따라하면 2등밖에 못합니다. 둘째, 온 가족이 함께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드라마를 만들어 주세요. 단적으로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함께 봐도 민망하지 않은 드라마죠. 자라나는 세대에게 ‘한국의 얼’을 일깨우는 정통 사극도 보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코로나 블루를 겪고 있는 국민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드리는 프로그램을 부탁합니다.”

-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라십니까?
“88 올림픽 개폐회식을 총연출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7천만 한민족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쳐 성공적으로 치른 평화의 제전으로, 직간접으로 관여했던 사람들뿐 아니라 전 국민의 가슴에서 빛나는 자랑스런 영광의 훈장이라고 생각합니다.”

- 어떤 세상이 되기를 바라시나요?
“문화의 힘으로 행복한 삶을 누리는 그런 세상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김구 선생이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고 하신 대로, 우리 자신이 행복하고 나아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행복을 주는 문화 선진국이죠.”

- 때 이른 이야기지만, 묘비명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
“제가 성이 표씨(表氏)라 표시 안 나게 살려 했는데 방송에 종사하다 보니 표가 좀 났습니다. 이름이 재순이다 보니 한때 여성인 줄 알고 팬 레터 보낸 분들도 있었어요.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살다 가면 됐죠. 묘도 안 만들 생각인데 묘비명이 필요하겠어요?”

이필재(신방 77입) 한국잡지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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