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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이야기] 세상을 바꾸는 연세인들 ⑫ - 안창수 화백
등록일: 2021-09-06  |  조회수: 2,066

“코로나19는 그림 그리는 사람에겐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어요. 작업실에 들어앉아 오로지 그림에만 전념할 수 있기 때문이죠.”
나이 예순에 그림을 시작해 올 가을 열일곱 번째 개인전을 여는 안창수(경제 65입) 화백은 “그렇기에 코로나 시절에도 그림은 좋은 취미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림 초보자도 꾸준히 그리면 코로나가 지나간 후 발표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안 동문은 은행원 출신이다. 한국수출입은행에서 58세에 정년퇴직했다. 은퇴 후 고향인 경남 양산으로 낙향해 대우조선해양 고문을 지냈다. 나이 예순에 중학교 친구와 취미로 서예를 배우다 재미로 그림을 그렸다. 그림 소질을 인정받자 제대로 배우고 싶었다.
이순의 나이에 중국으로 그림 유학을 떠났다. 항저우미술대에 적을 두고서 들어앉아 종일 닥치고 그렸다. 그러느라 붓을 쥔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뒤로 젖혀지지 않은 적도 있었다.
반년 만에 호모배 전국서화대전에서 입선을 했다. 이듬해엔 임백년배 전국서화대전에서 1등상을, 중화배 전국서화예술대전에서 금상을 받았다.
중국에서 2년 만에 귀국한 지 한 달 만에 이번엔 일본 교토조형예술대학으로 두 번째 그림 유학길에 올랐다. 유학비를 마련하느라 노후 대비책으로 장만한 서울의 오피스텔을 처분했다. 일본에선 소화미술대전에서 입선한 데 이어 일본 전국수묵화수작전서 한국인 최초로 대상 격인 외무대신상을 받았다.
“나에게 그림은 뒤늦게 만난 죽마고우예요. 이보다 행복할 순 없습니다. 인생 2막에 재능을 발견한 덕이죠. 친구 따라 서예에 입문하지 않았다면 꿈도 못 꿨을 삶입니다.”
2년 7개월에 걸친 늦깎이 유학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중국 유학 시절 미술을 전공하고 석사과정에 들어온 한국 유학생이 한번은 ‘한국에서 붓이라도 제대로 잡아보고 오시지’ 하더군요. 자존심이 상했지만 한편으로 오기가 생겼습니다. 누가 이기나 한번 해 보자 하는 심정이었죠.”
결국 그가 안 동문을 괄목상대하게 됐다. 스승이 그의 그림이 훨씬 낫다고 평가한 것이다.
그는 그림을 남들보다 세 배 빨리 그린다. 스승에게서 너무 빠르다는 지적을 받고 천천히 그리려 노력한 적도 있지만 결국 ‘속필’로 돌아갔다. 자연히 다작을 한다.
“특히 매화는 빨리 그려야 제대로 그릴 수 있어요. 힘 있게 확 붓을 돌려야죠.”
닭 그림으로 시작한 그는 호랑이, 독수리, 말 등 각종 동물화에 다양한 꽃을 그린다. 올 가을 개인전 주제는 연꽃이다. 꽃은 서양화가도 많이 그리지만 그는 새도 있는 화조화를 그린다.
그의 화풍에 대해 김상철 미술평론가는 “농담의 변화가 풍부하고 색채의 화려함이 강조된 그의 그림은 전통적인 운필과 색채 운용 방법에 더해 서구적인 조형 방법까지 차용하고 있다”고 평했다.
지난 2월 그는 KBS ‘아침마당’에 출연해 ‘도전하는 인생 2막’을 주제로 강연과 퍼포먼스를 했다. 화가가 게스트로 나온 건 아침마당 30년 역사상 처음이라고 한다.

-인생 2막엔 무엇에 도전하는 게 좋나요?
“1막에 못한 하고 싶었던 일, 좋아하는 일에 도전해야죠. 하고 싶은 게 뚜렷하지 않으면 남들이 잘한다고 칭찬하는 일을 하면 됩니다. 그런 일도 없다면 전문가의 강의를 찾아가 듣고, 롤 모델도 만나보고, 책도 읽으면서 내가 끌리는 게 뭔지 탐색하면 됩니다.”
안 동문은 시니어 배우이기도 하다. 2017년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에서 일본 문부대신 역을 맡았고, 울산KBS의 공익광고에 ‘폐지 줍는 할아버지’로 출연했다. 지금까지 대여섯 번 출연했다.
인터뷰가 있던 날 그는 니트로 된 빨간 색 상의를 입고 있었다. 그 위에 노란색 목도리를 센스 있게 둘렀다.
“정년퇴직한 후엔 옷을 내 맘대로 입습니다. 돌이켜보면 연세대학교 시절 멋쟁이들이 많았죠.”

-그 시절 어떤 학생이었습니까?
“하숙집과 학교만 오간 착실한 학생이었습니다. 고지식했고, 친구도 경제학과 동기 셋이 전부이다시피 했어요. 동아리도 못해 봤어요. 미술 동아리가 있는 줄도 몰랐죠.”

-연세정신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진취적이면서 발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선 선진적이라고 할 수 있죠.”

-캠퍼스와 신촌골에서 주로 어디를 다니셨습니까?
“교내에선 독수리상, 언더우드상, 노천극장, 청송대 등이죠. 동문 쪽에서 하숙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학교 앞에선 독수리다방에 자주 갔어요.”

-다시 대학생 시절로 돌아가신다면 뭘 해 보고 싶습니까?
“학교 공부에 전념하기보다는 동아리 등 다방면의 활동을 해 보고 싶습니다. 동아리는 미술 동아리나 봉사 동아리를 해 보고 싶어요.”

-대학 무용론도 나오는 시대입니다.
“그 젊고 예민한 시절 대학의 세례를 받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대학은 군대와 더불어 여전히 갈 만한 곳이죠.”

-좌우명이 뭡니까?
“자강불식(自强不息)입니다. 스스로 마음을 굳게 다지고 쉼 없는 노력을 하면 이룰 수 있습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야죠.”
그는 육순에 그림 공부를 시작한 후 스승들이 해 준 이야기를 들려줬다.
“중국의 금농은 쉰 넘어 붓을 잡았습니다. 예순을 훨씬 넘겨 대나무를 그리기 시작해 청나라 최고의 화가가 됐습니다. 일본 유학 시절 스승인 리고우 선생은 지금 이대로 하면 5년 안에 한국에서 대가가 될 거라고 했죠. 그 말을 믿고 액셀을 밟았어요.”
은행원 시절 그는 내부 고발자 노릇을 한 일이 있다. 그 바람에 인사고과 1위였지만 진급이 4년 늦어졌다. “정직해야 한다”고 훈육한 아버지의 영향이었다고 한다.

-버킷 리스트가 뭔가요?
“스폰서가 있다면 세계 무대에 진출하고 싶습니다. 서양의 화단에서 인정받고 싶어요.”

이필재(신방 77입) 한국잡지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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