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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이야기] 인물로 보는 연세 150년 ⑥ -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등록일: 2021-05-07  |  조회수: 4,511

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비운의 풍운아’이다. 1967년 그가 서른에 설립한 대우그룹은 1980년대~1990년대 재계 서열 2위였지만, 1999년 워크아웃 대상이 됐고 결국 해체됐다. 노년의 김 회장은 베트남을 오가면서 젊은 한국 사업가 양성에 힘썼다. 대졸자들에게 동남아 현지에서 무료로 취업 교육을 시켰다. 대우그룹 전‧현직 임직원 모임인 대우세계경영연구회가 2010년부터 베트남, 미얀마, 인도네시아 등에서 운영하는 글로벌청년사업가양성과정(GYBM·Global Young Business Manager) 프로그램이다. 그로서는 마지막 봉사였다.
청년 창업가였던 그는 생전에 가슴이 뛰는 기억은 대부분 젊은 날의 일들이었다고 털어놓았다.
“꿈이 없는 젊음은 젊음이 아니다. 젊음은 꿈이 있어서 소중한 것이다. 아니, 젊음은 꿈이 있어서 젊음인 것이다. 젊은이들이 주역이 되는 시대가 다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나보다 더 젊고 패기 넘치는 젊은이들이 우리 경제 나아가 세계 경제의 주역으로 우뚝 섰으면 좋겠다.”(그의 1주기를 앞두고 출간된 <역사는 꿈꾸는 자의 것이다-김우중 아포리즘>)
김 회장은 경기중‧고 출신으로 경제학과 56학번이다. 우리 학교 20~21대 총동문회장(1997. 4. ~ 2000. 7.)을 지냈다. 사재를 털어 신촌캠퍼스에 상경대학이 사용하는 대우관을 건립했고, 원주캠퍼스 부지를 사들여 우리 학교에 기증했다. 생전의 그는 “비록 세계 1백대 대학에서 배우지는 못했어도 우리가 1백대 대학의 동문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경제학과 졸업반 시절 마지막 학기 그는 기획재정부의 전신인 부흥부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당시 출석일수가 부족해 졸업을 못할 뻔했다. 그의 학회 서클 친구들이 교수 집으로 찾아가 통사정을 했고, 특별 리포트를 제출하는 조건으로 그는 가까스로 학점을 받았다. 이 일은 그가 사회생활을 하는 데 큰 교훈이 되었다고 한다. 1백만 부 넘게 팔린 저서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 그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회사를 세운 이래 직원들의 적당주의만큼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적당주의는 개인의 발전을 위해서나 또 회사를 위해서나 결코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수출로 대우를 초고속 성장시켰다. 자본금 5백만 원으로 직원 다섯과 창업한 대우그룹은 30년 만에 세계 5백대 기업에 진입했다. 그 시절 대우는 신화였고 그는 샐러리맨의 우상이었다. 그는 부실기업을 인수해 흑자기업으로 만드는 ‘경영의 마술사’였다.
1983년 그는 40대에 기업인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국제기업인상(International Business Award)’을 받았다. 국제상업회의소(ICC)가 3년마다 주는 상으로 아시아 기업인 최초의 수상이었다. 대우는 개발도상국 태생으로는 최대의 다국적기업으로 성장했다. 김 회장은 50인의 세계경제포럼(WEF) 자문위원 중 유일한 아시아인이었다. 외환위기 와중에 그는 전국경제인연합회장을 맡았다. 이 무렵 대우는 41개 계열사에 6백여 개의 해외 법인 및 지사를 거느렸다. 세계 경영의 기치 아래 국내 10만 명, 해외 25만 명의 대우맨들이 21개 국에서 현지화를 개척하고 있었다.
1970년대 말 대우는 북아프리카 수단에 타이어 공장을 지었다. 한국 기업이 해외에 지은 첫 공장이다. 더욱이 대우는 타이어 사업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수단 남부에서 대규모 유전이 발견됐다는 정보를 미국 관리로부터 입수한 김우중은 주변의 우려를 무시하고 공장을 지었고 그 후 여러 차례 증설했다. 국토의 80% 이상이 사막이고 도시 간에 차로 이동할 수밖에 없는 수단 측은 타이어를 사기 위해 돈을 맡겨 놓아야 했다. 1978년엔 미수교국이자 좌경 회교 국가인 리비아에 진출했다.
그러나 환난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단기 유동성 위기를 겪으면서 대우그룹은 공중분해되고 말았다. 대우 해체 후 해외에서 도피생활을 하던 김 회장은 귀국해 징역 8년 6개월, 추징금 약 18조 원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도전정신의 화신이었던 그에 대한 세인들의 평가는 엇갈린다. 대우 CEO 시절 1년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보낸 그는 이동시간과 호텔비를 절약하기 위해 주로 밤비행기를 탔다. 대우정신(사훈) 창조·도전·희생을 만들 때 그는 창조 말고 창의로 하자는 임원들을 이렇게 설득했다고 한다.
“창의는 아이디어일 뿐이오. 아이디어에서 그칠 게 아니라 뭔가 만들어 내야지.”
모교 재학 시절 장학금을 준 인연으로 그가 입사해 무역 일을 배운 한성실업의 오너 김용순 회장은 김우중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김 회장에게 그는 먼 친척뻘이기도 했다.
“6년 정도 근무했는데 머리가 비상했어요. 아무리 어렵고 복잡한 업무도 어떻게든 완벽하게 마무리 짓곤 했어요. 또 배짱이 얼마나 세고 통이 큰지 큰 인물이 될 거로 그때 알고 있었어요. 부하직원들 도와준답시고 봉급을 타 집에 1원도 갖다주지 않은 적도 있어요. 의협심도 강해 내가 집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중이는 크게 되면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감옥소 들어갈 놈이야’.”
그는 2019년 12월 9일 자신이 사재를 출연해 만든 대우재단이 인수한 아주대 병원에서 83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다. 대우재단은 아주대 병원을 중심으로 도서·오지 진료사업을 벌였다. 기초학문 연구지원 사업을 벌여 그 성과를 담은 대우학술총서, 대우고전총서 약 7백80권을 발행하기도 했다.
김우중은 한국전쟁 당시 대구에서 피란살이를 했다. 서울교대의 전신인 경기공립사범학교장, 서울상대 교수, 제주도지사를 지낸 그의 아버지 김용하가 납북되고 두 형이 입대해 그는 신문팔이를 해야 했다. 당시 또래 중에 신문을 가장 많이 판 그는 이를 위해 거스름돈을 미리 삼각형으로 접어놓았다 건넸다고 한다. 눈비가 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었다. 이북 출신으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그런 날 밤늦게 들어온 그에게 “먼저 먹었다”며 밥 한 그릇을 내밀었다. 끼니를 거른 동생들은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잠이 든 후였다. 그럴 때면 소년 김우중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밖에서 어묵 사먹었으니 어머니나 동생들이랑 드세요.”
모자는 서로 거짓말을 했지만 그가 가장 행복했다고 회상한 시절이다. 그가 훗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건 어린 시절 겪은 이런 고생과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그는 생전에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의 아호는 주산(宙山)이다. 원불교 대산종사가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는 별세 1년 전 천주교에 귀의해 바오로를 세례명으로 받았다.
“아무도 아직은 가지 않은 길, 아무도 아직은 해내지 못한 일을 추구하는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개척자에게만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역사는 꿈꾸는 자의 것이다-김우중 아포리즘>)
김우중 회장의 흉상이 신촌캠퍼스 대우관 1층 로비에 생긴다. 오는 5월 7일 제막된다.

이필재 (신방 77입) 한국잡지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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