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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동문 기고] 내가 겪은 연세 4.19 - 오동춘(국문 58입) 시인
등록일: 2021-04-05  |  조회수: 4,961

전국 백만학도가 참여하여 숨지던 민주주의를 살려낸 자랑스러운 4.19 혁명이 올해로 61돌 맞는다. 나도 연세인으로 참여했던 감회가 깊고 1960년 4월 19일 피의 화요일 서울거리를 책가방 들고 점심도 굶은 채 뛰었던 그날의 정경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국문과 3학년인 나는 4.19 그날 오전 수업 마치고 예배에 참여하기 위해 대강당 앞으로 갔다.  이날은 문과대, 정법대, 신과대 학생들의 예배가 있는 날이다. 정법대 학생들이 머리에 ‘학도여 깨여라’로 쓴 머리띠를 두르고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상대, 이공대 학생들도 몰려 왔다 “지금 시내는 경찰 총에 우리 학생들이 다 죽어 가고 있어요. 연세인이여! 우리도 시내로 나갑시다.” 이렇게 누가 외치니 모두 “나가자!” 함께 소리 지르며 들어선 백양로에 연세 시위 물결이 거세게 파도쳤다. 여학생들은 보호 차원에서 시위대열 가운데 참여시키고 그 앞뒤로 남학생 시위대가 여학생들 안전을 도모하며 시위했다.
“부정선거 다시하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신촌 로타리를 지나 이화여대 입구에 오니 수업 마친 많은 이대 여대생들이 연세여학생 시위대에 몰려와 합류했다. 우렁찬 구호를 외치며 아현고개를 넘어 굴레방다리께 오니 경기공고생들이 수업하다 말고 나와 학교담이 무너지게 구경하고 일부학생들은 대학생 형님들 시위대열에 참여했다. 서대문 로타리에 이르니 제2경무대로 불리던 이기붕 부통령 부정 당선자 집앞 도로는 트럭이 차도를 가로 막았다. 연세 시위대는 서울역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서대문 경찰서 안으로 어느 학생이 “자유당 사병경찰 정신차려라” 크게 고함치며 돌덩이 하나를 내던졌다. 서울역 세브란스병원 앞에 왔을때 “우리도 연세인”이라 소리치며 의학공부하던 연세의대생 3.4학년이 재빨리 뛰쳐 나와 시위대 제일 앞에 흰가운을 입고 앞장 섰다. 선두 지휘는 주로 정법대 3.4학년 학생들이 하고 있었다. 남대문 시경찰국앞에서 시위대는 열사람씩 스크럼을 짜고 지그재그로 “부정선거 다시하라”, “자유당 독재정권 물러가라” 외쳤다. 정의, 진리, 자유, 민주사랑의 힘찬 기백을 보이며 거센 시위가 높이 파도친 것이다. 나도 목소리가 커서 국문과 시위대열 앞에서 자주 구호를 외쳤다. 우리 국문과 앞에서 여학생들도 맹렬하게 시위를 잘 하는 모습이 대견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부정선거를 철저히 준비한 내무장관 최인규가 근무하는 을지로 입구로 연세시위물결이 흘러와 내무부앞에서 “부정선거 원흉 최인규 나오라”는 구호를 외치며 굳게 닫힌 내무부 문을 발로 쾅쾅차고 종로로 시위대가 갈 때 도로면 시민들이 몰려 서서 학생들 수고한다고 격려하며 물통에 가져온 물을 퍼서 건네 주었다. 고마웠다. 원남동 로타리를 돌아 3천여 명 연세시위대가 중앙청 앞까지 늘어 서서 시위했다. 우리 시위대 옆으로 총맞은 서울대생을 실은 윌리스 차 한 대가 서울대병원으로 내닫고 있었다. 경무대앞까지 쳐들어 갔던 학생 시위대가 경무대 경찰과 헌병에 밀려 중앙청 앞에서 구호 외치며 경찰과 맞서 시위했다. 대공 공포를 쏘던 경찰 총이 오후에 학생을 향하여 직접 쏘았다. 광화문 일대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무렵 연세 이공대 의예과 1학년 최정규 학생이 사망했다. 행정과 김흥수 학생도 어깨 관통상을 입었다. 1천여 명으로 줄어든 연세시위대는 광화문 거리 국회의사당앞 자유당 당사앞으로 나누어 시위하다가 마지막까지 남은 열열한 연세시위대 3백여 명이 모교 대강당 앞에 모여 고된 피로를 쉬었다. 이때 찾아온 백낙준 총장님이 “연세의 아들 딸들아 장하도다” 감격의 칭찬을 하시며 3.1운동 학생 지휘자 연희전문 대표 김원벽 선배의 3.1정신을 이어 받은 의로운 일로 높이 격려해 주셨다.
전국적으로 민주, 정의, 자유, 진리를 부르짖던 학생은 1백86명이 희생되었다. 학생들의 희생과 피와 땀으로 민주주의를 살린 4.19 원인은 무엇인가? 이미 알려진대로 1960년 2월 28일 휴일 등교에 항의시위한 대구지역 고교생들 민주시위를 도화선으로, 3월 15일 부정선거 당일 마산학생들의 부정선선거규탄 시위, 4월 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채 시체가 된 김주열군의 죽음, 4월 18일 고대생 3천명 국회의사당앞 시위 후 안암동 귀교길에 종로 3.4가 거리에서 자유당 정치깡패들의 기습폭력 구타행위 등에 분노한 전국 중 고교 대학생들이 4월 19일 총궐기 대대적인 시위를 벌인 것이다. 여기 우리 연세대 3천여 명도 정정당당하게 참여했다. 4월 25일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3백여 명 교수단 시위가 큰 힘이 되어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함으로서 학생들이 민주주의 승리를 이루었다. 교수단 시위 깃발 기수는 연세대 교수인 애국자 정석해, 권오돈 교수였다.
시민들도 참여하여 민권 승리를 이루었다. 학생들이 이룬 4월혁명 승리로 정권을 잡은 민주당 정권은 무능하여 8개월만에 군사정부에 정권을 빼앗겼다. 군사정부는 4.19의거로 폄하하고 기념식도 소홀히 치뤘다. 헌법전문에도 기록된 4.19학생정신으로 오늘의 부정, 불의, 법치파괴, 거짓 정치가 청산되고, 밝고 바른 정치로, 자유민주주의 사회로 발전해 가야 할 것이다. 1960년 4월 19일 연세대학교 학생일동으로 발표된 선언문 몇가지 사항의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1.부정<3.15> 공개투표의 창안집단을 법으로 처벌하라
2.권력에 아부하는 간신배를 축출하라
3.국민의 자유로운 의사표시를 허용하라
4.경찰은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치 말라
5.정부는 마산사건의 전 책임을 져라

연세는 자유 진리의 교훈과 4.19정신으로 더욱 나라와 겨레를 빛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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