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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이야기] 인물로 보는 연세 150년 ⑤ - 최이순 가정대학 초대학장
등록일: 2020-11-10  |  조회수: 4,471

1930년대 후반 미국 오리건주립대엔 한복을 입은 여자 유학생이 있었다. 그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자 동아일보는 이렇게 썼다.
“조선인에 대한 천박한 인식을 바꾸려 3년 간 하루도 조선 의복을 벗어놓은 일이 없고, 조선 음식을 장만해 현지 외국인들에게 대접했다.”
국내 최초의 4년제 가정대학인 우리 학교 생활과학대학을 만들고 초대 학장을 지낸 단형 최이순 선생이 그다. 현지인들에게 일본인·중국인으로 오인되는 게 싫어 유학생활 내내 한복을 직접 지어 입고 다닌 것이다. 일찍이 일제 강점기에 해외에서 민간대사의 역할을 한 셈이다. 바느질 솜씨도 뛰어나 당시 친구들 사이에서 별명이 ‘소잉 머신’(재봉틀)이었다고 한다.
선생은 한일합병이 된 1910년 황해도 안악에서 독립운동을 한 조선어문학자 최광옥의 넷째 딸, 유복녀로 태어났다. YWCA의 대모 격이었던 언니 최이권 여사(고 백낙준 초대 총장의 부인)와 함께 백범 김구 선생을 아버지처럼 따랐다.
우국지사의 딸로 민족적 자부심이 강했던 선생은 1965년 박정희 정부의 한일국교 수립에 반대하는 서명을 했다. 그는 이 반대 서명 건으로 그해 모교인 오리곤주립대 창립 97년 기념일에 외국인 최초로 공로표창을 받게 돼 있었지만 여권이 발급 안 돼 참석하지 못했다.
최이순은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 출신으로 아동학을 전공한 가정학자이다. 가정학의 불모지였던 이 나라에서 선구적으로 가정학 이론을 정립했고, 여러 여성단체에 참여해 여성의 인권 확립과 여권 신장에 앞장섰다. 또 1954년 이래 눈을 감을 때까지 사회복지법인 거제도애광원 이사·이사장을 지내는 등 평생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봉사했다.
우리 학교에서는 가정대에 국내 첫 아동학과를 만들었고, 국내 최초의 유아 대상 연구 기관인 어린이생활지도연구원을 설립했다. 최초의 학부생 학술연구논문집을 창간했고 국내 첫 남녀공학인 우리 학교의 초대 여학생처장을 8년 간 지냈다. 아이디어와 추진력이 뛰어났던 선생은 아동학과를 처음 만들 때 교육부 인가가 나지 않아 10년 간 신설학과 설립 신청을 했다고 한다.
아동학은 당시 사범대학 쪽에서 아동교육, 유아교육 등의 이름으로 가르치던 학문이었다. 선생은 아동·유아 교육의 범주를 넘어서 포괄적인 인간 교육을 하려면 아동학과를 인간의 기본적인 삶을 연구하는 가정대학에 둬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선생은 뛰어난 교육자이기도 했지만 탁월한 행정가였다.
선생은 무엇보다 학문의 실용화를 중시한 실천가였다. 그는 가정학에 대해 ‘실용화하지 못하는 아카데미즘은 무용지물’이라는 교육관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교육관에 따라 어린이를 가르치는 교사의 전문화를 꾀하기 위해 어린이교육협회를 창립해 초대 회장을 맡았다. 또 실천가로서 대한YWCA 연합회 이사,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이사,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한국어머니회 이사, 어머니학교 교장 등을 지냈다. 우리 학교 가정대 건물을 지을 땐 학교의 도움 없이 주도적으로 모금 운동을 벌였다.
여권 운동가로서 1960년 여성단체연합회가 축첩에 반대하는 가두행진을 벌였을 땐 선두에 섰다. 현실 문제에 어두운 여성, 억압 받는 여성들을 일깨우기 위해 선생은 글을 쓰고 강연을 했다.
학창 시절 정구선수였던 선생은 스포츠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깊었다. 연고전에 대한 긍지도 대단했다고 한다. 연고전 때면 여학생 응원단을 뽑아 응원 연습을 시키고 후원하기도 했다. 여학생을 괴롭히는 남학생을 혼내는 ‘호랑이 선생님’이었는가 하면 남학생들에게 점심을 사며 대화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의 등록금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선생은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문필가로 여러 편의 시와 수필을 남겼다. 이들 작품은 <살아온 조각보>란 작품집에 수록됐고, 나인용 모교 음악대학장은 졸업생의 앞날을 축복하는 선생의 시 한 편에 곡을 붙였다.

“(전략) 뜨거운 사랑 봉사의 종 되어
그대 가는 곳마다
창의의 새 탑이 세워 지리
(중략) 의욕의 불길 들과 산에 퍼져
그대 가는 곳마다
꽃 피고 열매 맺는 옥토 되리 (후략)”

생활의 과학화를 추구한 운동가인 선생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생활과학의 기본이라고 주창했다. 풀과 벌레까지 사랑했고, “관심은 사랑이 생기게 하고 사랑은 관심을 갖게 만든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수시로 말했다.
생전의 선생은 이렇게 적은 글을 주민등록증과 함께 휴대했다고 전해진다.
“내가 사고로 사망하더라도 절대 상대방의 책임을 추궁하지 말고 조용히 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선생은 임종을 앞두고 장례예배 대신 환송예배를 드려 달라고 부탁했고 시신을 우리 학교 의과대학에 의학실험용으로 기증했다. 우리 학교 생활과학대 건물엔 선생을 기리는 최이순 기념홀이 있다.

이필재 (신방 77입) 한국잡지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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