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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칼럼] 인물로 보는 연세 150년 世럽 오딧세이 ④ - 에비슨
등록일: 2020-09-03  |  조회수: 52

올리버 R. 에비슨은 제중원(세브란스의과대학)과 경신학교 대학부(연희대학교)를 모체로 하는 우리 학교의 정초를 놓은 사람이다. 그는 모태가 다른 두 민족 사학의 교장을 겸임하면서 두 학교의 통합을 추진해 뿌리가 다른 두 대학의 첫 자를 딴 ‘연리지’로 만드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일제 강점기였던 1933년 그는 연희전문학교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학교 신축 부지를 대여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두 학교 교수들은 수시로 체육대회를 여는 등 활발하게 교류했다. 말하자면 그의 연희전문 교장 재임 중 오늘의 연세가 태동했다고 할 수 있다.
에비슨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창립한 주역으로서 무려 33년 간 초대 교장으로 재직했다. 그리고 부교장으로 있다 초대 교장 언더우드 별세 후 맡은 연희전문학교의 교장을 19년 간  지냈다.
세브란스병원에 이름을 제공한 미국인 독지가 르위스 세브란스에게서 1만 달러를 기부 받은 사람도 에비슨이다. 조선 정부와 협상해 세브란스의과대학의 모태인 제중원의 운영권을 넘겨받은 후 선교병원으로 전환한 그는 안식년을 맞아 토론토대 의대 교수이자 토론토 시장 주치의로 있던 캐나다로 돌아간다. 조선으로 돌아오기 전 미국 선교부의 요청을 받아 뉴욕 에큐메니칼 선교대회에 참석한 그는 “한국의 의료 선교사 7인이 협력해 병원 한곳에서 일하면 더 효과적으로 의료선교를 할 수 있다”고 연설했다. 그의 연설을 들은 세브란스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아내와 지난 1년 간 어느 곳엔가 병원을 짓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가 마침내 응답을 받았군요.” 
에비슨은 1893년 봄 교수로서의 명예와 의사로서의 안정된 삶을 뒤로 하고 캐나다 벤쿠버를 떠나 두 달 만에 부산에 도착한다. 그 후 1935년 일흔다섯에 은퇴해 돌아갈 때까지 40여 년 간 조선 땅에서 의료선교사, 의학교육자, 대학행정가로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그의 가장 큰 공은 체계적인 의학 교육을 실시, 근대적 의사들을 배출했다는 것이다. 조선 최초로 의사 면허를 받은 1회 졸업생 일곱 명은 그가 후배들을 위해 학교에 남아 달라고 요청하자 모두 은사의 뜻에 따르겠다고 약속했다. 그 중 한 사람이 박서양이다. 박서양은 그가 처음 조선에 왔을 때 치료한 박성춘의 아들이다. 박성춘은 최하층 계급이었던 백정이었다. 이때 신분제도의 모순에 눈뜬 에비슨은 그 후 박성춘의 아들 박서양을 제자로 받아들여 의사로 교육했다. 박서양은 모교에서 후학을 양성하다 만주로 이주해 개업을 했다. 훗날 만주를 찾은 에비슨은 박서양을 만나려 했다. 에비슨의 숙소로 찾아온 박서양의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남편이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서다 반대 방향에 사는 한 환자에게서 왕진 요청을 받았습니다. 한참을 망설였지만 결국 환자 집으로 갔습니다.”
에비슨은 의학을 공부하려는 학생 모집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시간이 흐르자 지방 선교병원에서 의술을 배우던 학생이 의학을 배우러 오는가 하면 1906년엔 관립의학교 졸업생 두 명이 세브란스에 재입학했다.
그는 세브란스의전 교장직을 몇몇 선교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조선인 오긍선에게 넘겼다. 연희전문의 실질적인 운영은 유억겸에게 맡겼다. 그는 조선인들이 두 학교를 운영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1940년대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하면서 세브란스는 아사히의전으로, 연희는 대학의 재산이 몰수되는 한편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로 개명 당하는 수모를 겪었지만 두 대학 출신은 해방 후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그 배경에 두 학교를 민족 대학으로 만들려 한 에비슨의 뚜렷한 신념과 각고의 노력이 있었다.
1895년 콜레라가 창궐하자 조선 정부는 에비슨을 방역국장에 임명했다. 그해 단발령이 내려졌다. 훗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은 당시 제중원 여의사 파이팅의 한글 선생으로 일했다. 이승만은 에비슨과 긴 시간 토론을 한 후 단발령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에비슨은 진보적 신앙의 소유자였다. 그는 당시 많은 백인들과 달리 인종 간 지능에 차이가 없다고 믿었다.
“종족 간에 타고난 평균 지력은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아시아에서 40년 이상 살면서 상류층부터 가장 낮고 무시당하는 농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과 가까이 접촉하면서 얻은 답이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충분한 기간 공부와 동등한 실습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종족에 상관없이 모든 남녀가 동등하게 성취할 수 있다.”(에비슨의 회고록)
그는 1935년 11월 조선호텔에서 열린 송별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생이 진보하는 건 당연합니다. 우리는 늘 전진해야 합니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진보를 위하여 늘 생각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문교부장관을 지낸 고 백낙준 연세대 초대 총장은 에비슨에 대해 생전에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전형적인 영국인(영국 요크셔주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실직한 아버지를 따라 미국 뉴욕으로 가는 이민선을 탔다)으로 이해심이 깊고 강직했다. 사건의 핵심을 포착했고 결의에 용감했으며 위협엔 불복했다.”
에비슨은 96세에 별세해 사별한 부인 제니 곁에 묻혔다. 한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공로훈장과 문화훈장을 수여했다. 우리 학교 의료원 종합관 앞엔 그의 동상이 있다.

이필재 (신방 77입) 한국잡지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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