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 총동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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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연세총동문회 60년 발자취
등록일: 2020-04-28  |  조회수: 7,349

세브란스 동창회
세브란스 동창회가 언제부터 결성되어 왔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1909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교우회란 이름으로 매년 졸업식을 즈음해서 정기 총회를 열었다. 또한 교우회 주최로 학술강연회를 개최하고 <세브란스 교우회보>도 발간하여 학술논문의 발표, 학회 참관기, 학교 소식, 교직원 동정, 동창 소식 등을 알렸다. 동창회의 초창기는 제1회 졸업생인 홍석후 동문이 회장을 맡아 이끌었다. 1923년 동창회가 주축이 되어 에비슨 공적을 기념하기 위한 에비슨동상건립위원회를 조직하고 모금했다. 1928년 3월 21일 졸업식날 정기 총회를 열었다. 에비슨동상 제막식, 신축병원 낙성식 등이 동시에 열려 성대한 기념행사를 했으며 학술강연회도 개최했다. 1929년 대구 동창회지부를 결성한 것을 계기로 3인 이상의 동창이 거주하는 곳에 지부를 설치하고 지방활동과 의료봉사에 협조를 도왔다. 3월 20일 정기 총회를 개최하고 명예 회장 홍석후, 회장 이용설, 부회장 최동 등 임원을 선출했고, 이때 세브란스 교가가 선정됐다. 1934년 동창회 활약으로 모교 후원회 기금을 모금하여 3여만 원으로 기초학교실을 신축했다. 1935년 3월 13일 제26회 정기 총회를 열어, 전 임원의 유임을 결의했고, 동창회비는 매년 3원으로 결정했다.

연희동문회
1923년 3월 24일 연희의 제5회 졸업식이 끝난 후 동창 30여 명이 모교 식당에 모여 졸업생 친목기관 설치를 의논할 때 김형주(상과 1년)가 ‘우리 졸업생이 1백 명에 달하는데 연락기관이 없으니 이제 상설기관을 조직하자’는 의견을 제시했고,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초대 간부는 회장 김원벽, 부회장 김형주를 선출했다. 1924년 3월 15일 제1회 정기 총회를 열었고, 신입회원 26명(문과11명, 상과 12명, 수리과 3명)이 가입했다. 1925년 3월 14일 제2회 정기 총회를 열었고, 회장 최상현이 새로운 임원으로 선출됐다. 1931년 3월 14일 제8회 총회에서 매년 모교 도서관에 도서 기증 결의에 따라 톨스토이전집 22권(당시 시가 30원 60전)을 구입해 기증했고, 회보 발간을 위해 준비위원을 결성하고, 동문 파송이사 1인의 증원을 이사회에 요청해 승인 받았다. 1932년 3월 2일 제9회 정기 총회는 모교 본관 집회소에서 개최됐고, 동문회보는 1년에 1회 이상 속간하기로 했다. 1933년 3월 11일 제10회 정기 총회는 시내 명월관에서 열렸고, 회장 노준탁, 부회장 최봉칙 임원을 선출했다. 1936년 임시 총회를 열어 모교 창립 25주년 기념사업으로 체육관을 세우기로 결의하고 회원마다 50원 이상의 의연금을 거두기로 했다. 1937년 6월 20일 수원지회가 설립됐으며, 1938년 3월 총회에서 회장 신봉조, 부회장 이원철이 선임되었다. 1939년 5월 동경지회가, 7월에는 광주지회와 신경지회가, 10월에 장연지회가 각각 설치됐다. 1940년 기본적립금은 1,664.89원이었으며 회원은 총 1천40명이었다. 1944년 4월부터 일제가 연희를 강점하고 교명을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라고 개칭했으며 동문회 운영권까지 강탈했다. 당시 교장이던 가라지마는 동문회 적립금까지 모두 유용했고, 동문회 활동이 정지상태에 놓이게 됐지만, 동문회는 재조직되어 갈홍기 동문이 회장을 맡았다. 1946년 3월 17일 이화여고 강당에서 연희동문회 정기 총회가 개최되었다. 70여 명의 회원이 참석했고, 학교 운영난에 대해 1백만 원을 8월 안으로 기부하기도 결의했다. 회장 이묘묵, 부회장 최규남 등이 선임됐다. 1946년 4월 26일 해방 후, 첫 창립기념일을 맞아 다채로운 행사가 있었고 동문회에서는 모교 후원책으로 30여만 원의 재정적 협조를 했다. 1949년 5월 31일 소공동 봉래각에서 연희대학교 후원회 이사회를 개최했다. 증축비 1백만 원을 예산한 바 설경동 20만 원, 계병호 10만 원, 독고선 10만 원, 윤영선 15만 원 등의 기부로 1백20만원이 그 자리에서 모였다. 이 때 교수들도 봉급의 2.5퍼센트를 떼어 증축에 기부하기로 결정했다. 1952년 4월 3일 625 전쟁 피난지 부산 영도 남항국민학교에서 총회를 개최했다. 별도의 재정위원회를 구성했고, 대전, 마산, 전주, 광주, 군산 등 5개 지부 설치를 결의했다. 회장 정일형, 부회장 독고선이 선출됐다. 1954년 4월 24일 부산 해군장교구락부에서 하와이 교포들이 모금한 본교 여학생 기숙사 건립을 위한 기금을 김정순으로부터 전달받고 초대회를 개최했다. 이를 기념하는 뜻에서 여학생기숙사를 그 해 10월 개관 후, ‘알로하’라 명명했다. 7월 3일 동문회보 2천6백부를 발행해 배부했고, 9월 15일 <연희동연록> 1천부를 발간해 동문에게 배부했는데 이는 1941년 발간 후 13년만에 간행한 것이다. 1954년 10월 2일 동문회 임시총회는 기념관 신축비로 1천5백만원을 보조한다는 것과 언더우드 동상 및 원한경 묘비건립을 결의했다. 1955년 4월 22일 창립 40주년 기념일을 맞아 원두우 동상 제막식을 가졌다. 창립기념행사 후, 본교 소강당에서 동문회 총회가 열렸다. 명예 회장 백낙준, 회장 이원철이 선정됐다. 기념관(학생회관) 건축기금 모금은 계속되어 그 해 9월 16일 1,447,500원을 모았다. 1956년 6월 16일 임원회에서 직업별 동문 분과회를 조직하는데 합의했고, 11월 29일 연우 경제구락부가 정식 발족했다. 한편, 1956년 5월 창립기념을 계기로 학교는 모교일을 제정하여 졸업 25주년이 되는 동문들의 재상봉 행사를 만들어 모교와 동문들간의 유대를 강화하고자 했다. 첫 모교일 행사는 1931년 졸업 동문들이 주재하였다. 1956년 10월 9일 개최된 임원회에서 모교의 교명을 ‘연세대학교’로 건의하고, 언론인 구락부의 결성을 촉진하기로 결의했다. 1957년 연희동문회 정기 총회는 졸업식날인 3월 2일 모교 청경관에서 개최됐고, 당시 국방부장관인 김용우가 회장으로 당선됐다. 6월 21일 동문회 임원회에서 연세대학교 동문회로 발족하자는 제의가 채택됐다. 연희와 세브란스의 합병으로 인해 두 대학 동문회의 통합을 위한 예비 친선 모임은 활발히 진행됐다.

연세대학교 총동문회
연세대학교 동문회는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의과대학이 통합하여 연세대학교로 발족함에 따라 1960년 4월 4일 연희대학교 동문회와 세브란스 동창회가 통합함으로써 이뤄졌다. 1960년 4월 4일 한청빌딩에서 연세동문회 창립 평의원회가 열렸다. 연세동문회 규칙을 제정하고, 임원선거를 무기명투표로 표결해 회장 이원철을 선출했다. 4월 16일 제2회 임원회를 한국회관에서 열었다. 이날 동연록 인쇄와 지부순회에 관해 논의했고, 5월 14일 창립기념일 행사에 관해 협의했다. 1964년 11월 26일 한청빌딩에서 평의원회가 열렸다. 모교 창립 8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인 학생회관 건축비 모금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을 결의했다. 1965년 5월 31일 평의원회에서 무기명투표에 의해 회장 이용설 부회장 김윤경이 선임됐다. 1965년 6월 18일 한청빌딩 동문회 사무실에서 평의원회가 열려 동문회 입회비를 200원에서 300원으로 인상할 것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1969년 5월 20일 모교 경영대학원 강당에서 동문회 규약 개정에 따른 첫 대의원대회가 열렸다. 박동규가 신임회장으로 피선되었다. 1971년 8월 2일 아서원에서 임원회의를 열고 동문회보의 간행을 위한 토의에 들어가 명칭(연세동문회보)과 크기(타브로이드판 16면), 부수 등을 결의했다. 9월 7일 아서원에서 연세동문회보 간행에 대해 회보의 본문은 한글 사용을 위주로 하되 이름은 한자로 할 것, 제호는 <연세동문회보>로 하고, 휘호는 저명인사에게 의뢰할 것 등을 결의했다. 12월 7일 아서원에서 임원회의를 열고, 홈커밍 데이 초청자를 졸업후 15주년, 25주년, 35주년, 45주년으로 하자는 안건을 결의 했다. 1973년 6월 30일 모교 경영대학원 강당에서 대의원 총회를 열고, 무기명 투표로 회장 김명회가 선출됐다. 1977년 6월 25일 모교 경영대학원 강당에서 대의원 총회를 열고, 회장 김용우의 유임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1981년 7월 11일 모교 경영대학원 강당에서 대의원 정기 총회를 열고, 회장 방우영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9월 21일 코리아나호텔에서 이사회를 열고 임원들은 동문회 활성화를 위해 2억원 기금 모금과 동연록 재발간하여 배부 등 활동을 다짐했다. 1981년 9월 30일 방우영 회장실에서 임원회를 열었다. 이날 중요 안건으로 기금조성목표 2억 원, 기금모금을 위한 ‘연세의 밤 개최’를 결의했다. 1981년 12월 2일 오후 6시30분, 롯데호텔 크리스탈 볼룸, 5백명, 회비 5만원과 1982년도판 동연록 발행에 대해 1만부 발행과 발행예정일(1982년 3월), 발간비(4천만 원) 등을 결정했다. 1983년 9월 17일 코리아나호텔에서 대의원 정기 총회를 열고, 회장 방우영의 재추대를 만장일치로 가결시키고, 연세 100주년 기념사업과 동문회관 건립을 계획했다. 1984년 7월 5일 모교 영빈관에서 상임이사회를 열었다. 6월 30일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연세 100주년 기념관 취지문’을 공고한 사실 등 경과보고가 있은 후 모금방법에 대한 토의에 들어갔다. 10월 12일 코리아나호텔에서 상임위원회를 열었다. 100주년 기념사업 후원회 규정 및 연세 창립 100주년 기념사업후원회 회장이 100주년 기념관 건립에 대한 취지문을 동문들에게 알렸다. 한편, 동문회는 1993년 5월 8일 연세동문회관을 봉헌했다. 1981년 방우영 회장이 취임하면서 동문회관 건립을 제안했으며, 1987년 본격적인 기금 모금과 건축설계 등이 시작됐다. 연면적 2천90평 규모로, 총공사비는 72억2천5백만 원이 들었다.
1999년 5월 연세창립 1백14주년을 맞아 총동문회가 주관한 노천극장 확장 사업은 총공사비 70억 원으로 현대식 시설을 갖춘 공연 문화의 장으로 거듭났다. 동문들의 모교 사랑은 후배들에게 이어져 2001년 (재)연세동문장학회를 설립했다. 등록금 전액은 물론 매달 교제비 50만 원을 지원하는 파격적인 규모로 많은 후배들이 지원하고 있다. 지금까지 1백80명의 장학생을 선발했으며, 약 35억 원의 장학금을 전달했다. 한편, 동문회는 2008년 11월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명칭을 총동문회로 변경했다. 이것은 동문수의 증가와 더불어 각 단과대학 동문회의 규모와 행사가 커짐에 따른 것이다.

역대 회장
제1대 이원철 (수물과) 1960 ~ 1962

제2대 박용준 (의과) 1962 ~ 1963

제3대 이환신 (문과) 1963 ~ 1965

제4대 이용설 (의과) 1965 ~ 1967

제5-7대 박동규 (상과) 1967 ~ 1973

제8대 김명회 (정외과) 1973 ~ 1975

제9-11대 김용우 (수물과) 1975 ~ 1981

제12-19대 방우영 (경제학과) 1981 ~ 1997

제20-21대 김우중 (경제학과) 1997 ~ 2000

제22-23대 박정구 (법학과) 2000 ~ 2002

제24-25 이병무 (경영학과) 2002 ~ 2008

제26-29 박삼구 (경제학과) 2008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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