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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칼럼] 4·19 정신과 함께 한 나의 60년
등록일: 2020-04-28  |  조회수: 6,161

공주사범학교를 다닐 때부터 연세 사학과에 홍이섭 교수님이 계시다는 말씀을 듣고 사학과에 합격하여 대학생활을 시작하였으나, 상경한 서울 생활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고향 친구(조상현)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구한 가정교사를 할 수 밖에 없던 대학생활이었기에, 학과의 가장 중요한 행사인 정기 학술답사(봄, 가을)와 제1회인 학사장교(ROTC) 훈련에 참가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은 지금까지도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2학년이 되던 1960년에는 ‘3·15 부정선거’로 시국이 점차 불안해져 가고 있었다. 고등학생 김주열의 죽음으로 야기된 ‘마산의거 사건’은 그 기폭제가 되어 시국을 걱정하는 많은 움직임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모교 총학생회에서도 3월의 채플시간에 당시 <씨알의 소리>와 <사상계>를 중심으로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던 함석헌·장준하 선생을 초청하여 ‘꿈틀거리는 민족이어야 산다’라는 주제로 자유민주주의와 자주정신의 중요성을 고취하기도 하였다. 이 때,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이 민주항쟁의 의거로 피를 흘리며 종로5가 시장 골목을 지나가던 모습을 가정교사 3층집에서 필자가 직접 목도한 것은 큰 충격이었다. 그 다음 날인 4월 19일 오전부터 학교 도서관에 있던 우리들에게도 “채플시간에 강당 앞으로 나오라”는 연락이 돌았다. 박승원(당시 철학과 2년, 현 천주교 부산교구 원로신부)·양정성 학우(당시 화학과 2년, 현 경남대학교 명예 교수)와 함께 책가방을 도서관에 그대로 놓고 참가하였다. 12시 채플의 시작과 함께 학생회 간부들이 “나가자!”라고 하면서 많은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신촌 로타리를 거쳐 이대 앞에 가서는 “나와라!”라고 소리치기도 하였다. 여세를 몰아 서울역에 가니 흑석동에서 온 중앙대생과 청파동에서 온 숙대생들이 큰 무리를 짓고 있었다. 우리들이 도착하니 큰 박수와 함께 “가자!”라고 하여 모두 섞여서 어깨동무를 하고 남대문과 덕수궁을 거쳐 중앙청 앞으로 내달려갔다. 우리들의 얼굴과 몸은 벌써 땀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그 자리에는 문리대생과 법대생들(서울대) 그리고 동성고등학교 학생들이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은 “경무대로 가자!”라며 통의동 파출소 쪽으로 돌진하였다. 통의동으로 꺾어져 나갈 때 기관총과 같은 총소리에 앞에 나섰던 학생들이 우리들 쪽으로 피하여 왔다. 그 가운데 우리학교 의예과 2년 최정규 열사가 희생되었음을 뒤에서야 알게 되었다. 할 수 없이 서울역으로 물러났다가 각 대학으로 흩어졌다. 학교로 돌아오니 백낙준 총장님은 최현배 부총장님, 여러 교수님들과 함께 우리들의 무사귀교를 기다리고 계셨다. 대충 모인 학생들이 5백 명쯤 됐을까? 백 총장님께서는 “자랑스러운 아들, 딸들아! 여러분들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우리들이 하지 못한 일을 하였다. 장하다!”라고 하시며 눈물을 흘리시면서 말씀하셨다. 이어서 최 부총장님은 “여러분들의 행동은 새로운 역사를 만든 아주 중요한 결연한 의거”라고 치하했고, 학생대표가 “대한민국 만세! 연세대학교 만세!”라고 크게 외치자 우리 모두 감격스러움에 목메어 울음바다가 되었다. 다음 날에도 도서관에 갈 생각으로 학교에 갔다. 이 때 총학생회는 4·19 데모로 새로운 민주질서에 따른 올바른 시민사회를 도모하고 어지럽혀진 도로의 청소작업과 질서 확립을 위하여 ‘수습반’을 조직하고 있었다. 필자는 이 뜻에 적극 참여하여, 4월 20일부터 25일까지 5일간 신촌 로터리에서 광화문까지 청소를 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그려 보았다. 4월 25일 있었던 ‘전국 교수항의데모’에는 정석해 교수님(철학과)을 중심으로 권오돈(국문과)·김정수(사학과) 교수님들이 참가하셨다. 특히 백발의 권 교수께서는 플래카드를 직접 들고 시가행진을 하시기도 하여, 데모에 참여하였던 우리들은 교수님들이 무척 자랑스러웠다. 다음 날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함으로 자유당 정권이 몰락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 해 5·16 쿠데타가 일어나 시국이 불안하여 시험을 레포트로 대신하고, 마침 가정교사도 끝나 고향(서산)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목숨을 걸고 일으킨 4·19혁명이 5·16으로 수포로 돌아간 것에 개탄하면서, 고향에서 봉사활동을 벌리고자 하였다. 고향에 모인 6명의 친구들이 농촌계몽봉사에 뜻을 모아 구두닦이와 국민학교만 졸업한 청소년들을 모아 가르치기로 하고 그 대표를 맡게 되었다. 이 봉사활동은 큰 보람이 있어 일생의 업으로 할까 생각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평생의 친구인 홍순국 학우가 보내준 <연세춘추>에 실린 마지막 3차 등록기일을 보고, 학업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결단을 내리고 다음날 상경하여 등록을 마쳤다. 어려운 형편은 더욱 절박하게 현실로 다가와 당장 숙식이 가장 큰 문제로 등장하였다. 이때 홍순국 학우가 대표로 있던 연세 산악반의 사무실(강당건물에 있었음)에 잠잘 수 있도록 배려해주어 야전용 침대와 침낭을 주어 여러 밤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런 어려움과 씨름하고 있을 때 친구 조상현의 소개로 중학교 은사님의 댁으로 가게 되어 학부를 마칠 수 있게 되었고, 바로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대학원에 진학하여 홍이섭 교수님의 지도를 받아 한국천주교회사를 전공하면서 3학기를 보냈다. 그런데 공주 출신이며 사학과 조교를 맡고 있어 공주 석장리 구석기 발굴의 1차 조사부터 계속 참여하면서 전공을 박물관에서 구석기로 바꾸게 되었다. 이 결정에는 홍이섭 교수님의 넓으신 이해와 격려가 있었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지금까지도 이 대목은 선생님께 평생 미안하고 죄송스러운 마음이다. 선생님의 부탁말씀처럼 ‘큰 학자가 되겠다’라는 일념으로 학교에서 잠을 자면서 노력하였다. 모교 박물관에서 늦게 시작한 구석기를 공부하며 평생의 은사이신 손보기 교수님의 지도를 받아 구석기연구에 전력하면서도 손 교수님으로부터 일제하의 독립운동과 광복 후의 반탁운동 등에 관한 많은 말씀을 자주 들으면서 현시국의 비정상적인 상황에 큰 고민을 같이 걱정하기도 하였다. 이때 기억에 남는 것은 5·16 정권의 언론통폐합에 맞서 싸운 동아일보의 ‘언론자유 수호격려(백지사태) 광고’에 박희현 동문의 열성에 힘입어 ‘연세대 대학원 사학과’라는 제호로 5차례(1975. 1. 25~3. 8) 후원한 기억과 기록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통쾌하다. 박물관에 근무하면서 전공을 구석기고고학과 박물관학의 연구를 계속하고, 그 뒤 충북대 교수로 30여 년간 후학을 가르친 40여 년의 업적으로 박물관학 분야로는 한국박물관학회를 창립하고 여러 행사를 진행해 (사)한국박물관협회로부터 ‘자랑스러운 박물관인 상’과 문화재청으로부터 ‘옥관문화훈장’을 수상하게 되었다. 구석기학 분야로는 우리나라 구석기 연구의 첫 출발점인 석장리 구석기유적의 1차 조사 때부터 손보기 선생님을 모시고 10차 발굴(1964~74)에 까지 참여하였고, 이어서 충북대에 근무하며 청주 두루봉·소로리유적과 단양 수양개·구낭굴유적 등을 발굴하였다. 이들의 연구결과를 국내·외 학계에 발표하여 모교에서 구석기분야에서는 처음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러시아와 중국으로부터 명예 고고학박사와 명예이학박사를 받으면서 한국과 아시아의 구석기학회를 창립하고 현재는 아시아구석기학회의 명예 회장으로 있다. 또한 수양개를 기념한 국제회의(수양개와 그 이웃들)를 1996년부터 매년 개최하여 세계 여러 나라들의 적극 참여하는 회의로 발전시켜 올해 25회를 준비하고 있다. 필자의 경력은 4·19세대들이 우리 학계의 발전에 동력적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주는 한 모델이라고 자평하고 싶다. 결혼한 후 바로 1974년에 아내가 약국을 차리면서 전화가 필요하게 되어 상경한지 15년 만에 전화를 갖게 되었다. 여기에 ‘4·19 세대’의 정신을 잇고자 하는 마음에서 ‘34-4190’의 전화번호를 어렵사리 매입(백색전화)하여 사용하였다. 그 뒤로도 충북대에 교수(전임강사)로 발령을 받고 청주로 거처를 옮기면서도 전화번호 ‘4190’을 그대로 계속 사용하였다. 이렇게 하는 길이 4·19정신을 이어갈 수 있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충북대 교수 30여 년의 생활을 마감하면서 수양개와 두루봉유적의 구석기 문화 연구를 더욱 발전시키고 국제화하고자 하는 염원으로 (재)한국선사문화연구원을 2005년 개원하였다. 이 개원에 따른 여러 준비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전화번호이기에 바로 ‘4190’을 그대로 쓰기로 하여 이사장실, 집, 필자와 아내의 손전화 까지도 모두 ‘4190’으로 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아들과 딸의 집 전화까지도 동일하게 같은 번호를 주어서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4190’의 전화번호는 우리 아들과 딸을 넘어서 그들로부터 태어나고 자란 손주·손녀들께도 4·19정신을 심고 넘겨주는 다리로 남게 될 것이다. 또한, 많은 지인들과 제자 그리고 학문적으로 사귄 외국의 교수친구들에게도 ‘4·19 정신’으로 구석기학과 박물관학의 발전과 국제화를 위하여 노력한 한 학자로 기억되기를 희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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