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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세계 1백대 대학에서 배우지는 못했어도, 1백대 대학의 동문은 될 수 있다”
등록일: 2020-01-17  |  조회수: 5,945

김우중(경제 56입) 전 총동문회장을 기리며

모교를 글로벌 대학으로 이끌고 세계 1백대 대학으로 발전시키려는 김우중(경제 56입) 회장의 의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말이다. 모교 상경대학은 창립 1백주년을 맞아 2014년 10월 2일 김우중 회장 초청 강연을 개최했다. 강연이 열린 상경대학 건물은 김우중 회장이 거액을 기부해 설립됐고, ‘대우관’으로 불린다. ‘자신만만하게 세계를 품자’라는 주제로 특강에 나선 김 회장은 “오랜만에 교정에 들어와서 감회가 새롭다”며 “젊은 세대가 못다 이룬 ‘세계경영’의 꿈을 이뤄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문구로 유명한 대우의 세계경영을 회고하며 선진한국을 위해 필요한 세 가지로 ‘제조업 강화’와 ‘남북통일’, ‘자신감’을 강조했다. 이날 강연에 앞서 당시 홍성찬 상경대학장은 김우중 회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하며, “연세대 대선배로 상경대 1백년간 최고의 글로벌 인재”라며 “지금의 대우관을 사비를 털어 건립하고 원주캠퍼스 부지를 매입해 학교에 기증한 분이다”고 소개했다. 제20~21대(1997. 4. 25 ~ 2000. 7. 20) 총동문회 회장을 지냈다.

불꽃 같았던 83년, 2천명 배웅 속 영면 고(故)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12월 9일 자정께 83세로 별세했다. 12월 10일 이른 아침부터 정재계 주요 인사들을 포함한 1만여 명이 조문했다. 김우중 회장은 12월 12일 수원시 아주대병원 대강당에서 열린 영결식을 끝으로 영면에 들었다. 이날 2천여 명의 조문객이 방문해 그를 배웅했다. “김우중 회장님은 저희와 평생을 함께한 가족이자 큰 스승님이었습니다. 엄격하지만 동시에 자상했고, 부하들을 아주 끔찍이 사랑하셨습니다” 김태구 전 대우자동차 회장은 이같이 고인을 추모했다. 추모 영상에서 생전 인터뷰를 통해 고인은 대우그룹 전성기 시절을 회고했다. 김우중 회장은 “대우의 사훈인 ‘창조’, ‘도전’, ‘희생’ 이 세 가지에는 우리의 진정성이 담겨 있다. 이 한결 같은 마음으로 우리는 세계로 나갔고 시도해보지 못한 해외 진출을 우리가 처음으로 해냈다”며 강한 자부심을 나타냈다. 대우그룹 해체 후 뿔뿔이 흩어졌던 ‘대우맨’들이 2009년 김 회장을 중심으로 모여 설립한 사단법인 대우세계경영연구회가 장례 절차 전반을 맡았다.

30세 창업, 30년 만에 재계 2위 1989년 발행된 에세이집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 김우중 회장은 사람이 잃어버려선 안되는 것 중 첫째로 ‘이름’을 들었다. 1967년 창립된 대우그룹은 30년 만에 1990년대 말 재계 2위로 수출 강국 한국의 초석을 다진 기업으로 평가된다. 삼성과 현대를 키운 이병철, 정주영 등 1세대 창업가와 달리 김우중 회장은 샐러리맨으로 출발한 1.5세대 창업가로 꼽힌다. 삼성·현대·LG 등 기업들이 쌀·청과물·포목 등을 취급하는 개인상점 수준에서 장사를 시작한 것과 달리 대우는 처음부터 주식회사로 출발해 내수보다 수출, 곧 해외시장을 주력으로 삼아 성장했다. 그의 성공신화는 만 30세 때인 1967년부터 시작됐다. 섬유 수출업체인 한성실업에 근무하던 ‘청년 김우중’은 트리코트 원단생산업체인 대도섬유의 도재환씨와 손잡고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대우(大宇)는 대도섬유의 대(大)와 김우중의 우(宇)를 따서 만든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자본금 5백만 원으로 출범한 대우실업은 첫해부터 싱가포르에 트리코트 원단과 제품을 수출해 58만 달러 규모의 수출실적을 올린 데 이어 인도네시아, 미국 등지로 시장을 넓혀 큰 성공을 거뒀다. 대우실업은 1968년 수출 성과로 대통령 표창을 받으며 급성장 가도를 달렸다. 1969년 한국 기업 최초로 호주 시드니에 해외 지사를 세웠고, 1975년 한국의 종합상사 시대를 연 이후 대우는 국내 중소기업의 수출창구가 됐다. 1973년에는 영진토건을 인수해 대우개발로 바꾸고, 대우실업과 합쳐 그룹의 모기업격인 (주)대우를 출범시켰다. 1976년에는 옥포조선소를 대우중공업으로 만들었고, 1974년 인수한 대우전자와 1983년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합쳐 대우전자를 그룹의 주력으로 성장시켰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대우그룹은 에콰도르(1976년), 수단(1977년), 리비아(1978년) 등 아프리카 시장 진출을 통해 해외사업의 터를 닦았다. 거침없는 확장 경영의 결과 창업 15년 만에 대우는 자산 규모 국내 4대 재벌로 성장했다. 해외영업에서 남다른 수완을 발휘한 김 회장은 박정희 정권에서 가장 두드러진 기업인으로 주목받았다. 1990년대 동유럽의 몰락을 계기로 폴란드와 헝가리, 루마니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자동차공장 등을 인수하거나 설립하며 세계경영을 본격화했다. 1998년말, 3백96개 현지법인을 포함해 해외 네트워크가 모두 5백89곳에 달했고 해외고용 인력은 15만2천 명을 기록했다. 당시 김우중 회장은 연간 해외 체류기간이 2백80일을 넘기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1997년 11월 닥친 외환위기로 세계경영 신화는 멈췄다. 김대중 정부 경제관료들과의 갈등과 마찰을 빚으면서 붕괴가 빨라졌다. 1998년 3월 전경련 회장을 맡은 김 전 회장은 ‘수출론’을 집중 부각했지만, 관료들과 갈등은 여전했고 오히려 개혁의 대상으로 내몰리는 상황을 맞았다. 1998년 당시 그룹 구조조정의 최우선 핵심사안으로 꼽혔던 대우차-제너럴모터스(GM) 합작 추진이 흔들렸고, 금융당국의 기업어음 발행한도 제한 조치에 이어 회사채 발행제한 조치까지 내려져 급격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대우그룹은 1999년 말까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구조조정 방안을 내놨지만, 1999년 8월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 대상이 되면서 끝내 해체됐다. 김 회장은 대우그룹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2006년 징역 8년6월과 벌금 1천만 원, 추징금 17조9천2백53억 원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2008년 1월 특별사면됐다. 대우는 여전히 한국 대표기업 대우라는 이름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따라다닌다. 세계시장을 개척할 때도 마찬가지다. 1975년 종합무역상사 시대가 열리자 대우는 수단과 나이지리아, 리비아 등 아프리카 시장을 개척했고 1992년 한국과 중국의 수교가 이뤄지기 7년전 중국에 들어가 1987년 이미 한국기업 최초로 합작법인을 설립했다. 김우중 회장은 노태우 정부 때 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해 1991년 12월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의 가교역할을 했다. 1992년 1월 북한을 공식 방문하고 돌아오며, ‘가보고 싶었던 마지막 남은 시장이 여기 북한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외환위기 당시 대규모 부실로 1999년부터 해체 수순에 들어갔으나 대우조선, 대우건설, GM대우 등 주요 관계사들은 여전히 한국 제조업 각 분야를 대표하는 기업들이다. 1998년 대우그룹에 사망선고가 내려지지 않았다면 김우중 회장은 어디까지 나아갔을까? 세계경영 속 무리한 투자와 과다한 부채가 발목을 잡았다고 하지만, 경제관료들의 정치적 판단 오류 때문에 기획해체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김우중 회장은 2014년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가 집필한 대화록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통해 대우그룹의 ‘기획 해체론’을 주장했다. IMF 시절 구조조정을 맡았던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은 김 회장에 대해 “세상을 누비면서 본 그는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었다. 어디 두려움뿐이랴. 한계도 없고 사고방식도 독특했다”고 표현했다.

베트남에서 청년사업가 양성 주력 김우중 회장은 과거 본인이 시장을 개척한 베트남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 머물며 동남아에서 인재양성 사업인 ‘글로벌 청년 사업가(Global Young Business Manager)’ 프로그램에 주력했다. “청년들의 해외진출을 돕는 GYBM 교육사업의 발전적 계승과 함께 연수생들이 현지 취업을 넘어 창업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체계화해줄 것”을 유지로 남겼다. 그는 한국에서 투병에 들어간 2017년 말 이전까지 ‘글로벌 청년 사업가’를 육성하기 위해 마지막 투혼을 불살랐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김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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