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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이야기] 인물로 보는 연세 150년 ① - 윤동주 시인
등록일: 2019-11-01  |  조회수: 5,063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윤동주의 <서시> 첫 단락)

모교의 두 캠퍼스엔 윤동주 시비가 있다. 신촌 캠퍼스 <서시> 시비 앞엔 거의 언제나 꽃이 놓여 있다. 학창 시절 우리는 시비 앞을 지나며 이렇듯 명징한 말로 심오한 시를 쓴 우리 또래의 식민지 청년을 떠올렸다. 그렇게 윤동주의 순수한 감성은 우리의 감성이 됐다. 그의 저항정신은 연세 동산에 머무는 동안 우리의 DNA에 새겨졌다.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시대이다. 그래서 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려 했던 그의 삶과 정신세계에 시선이 머문다. 서시는 부끄러움 없이 살겠다는 윤 시인의 양심 선언이었다. 그의 영향으로 우리도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려다가도 마침내 마음을 바꾸게 된다.  윤동주는 일제 강점기에 짧고 굵게 살다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족 시인이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한국문학사의 큰 봉우리인 윤 동문은 젊디젊은 스물여덟에 일제에 의해 스러졌지만 그의 시는 여전히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서시>, <자화상>, <별 헤는 밤> 등은 세계적인 명시”(윤동주의 무덤을 옌볜에서 찾아 세상에 알린 오무라 마쓰오 일본 와세다대 명예 교수)라는 평가를 받는다. 윤동주의 시는 서정시로서, 기교적으로도 뛰어나다. 한반도의 모든 동포가 침묵했거나 또는 강요당한 친일을 하던 시대 그는 일제가 유일하게 허가한 순수문학을 했지만 “윤동주만큼 강하게 시를 통해 죽음의 저항을 선언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김우종 문학평론가) 심지어 그 시기는 인류가 군국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혀 지구적으로 시를 외면한 시절이었다. 그 불우한 시대 불온한 청년 윤동주는 시와 행동을 일치시켜 독립운동에 나섰고 일본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생체실험을 당한 끝에 순교자적 죽음을 맞았다. 윤동주는 대표작인 <서시>를 1941년 11월 20일 완성했다. 다음 달 일제는 미국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을 도발한다. 당시 연희전문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던 그는 열아홉 편의 시를 골라 시집을 출간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일제가 우리말의 사용과 우리말 창작을 억압했던 것과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결국 이 시는 해방 후 간행된 첫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서른 편의 다른 시와 함께 실렸다. 이렇게 그는 죽고 나서야 비로소 시인으로 태어나 세상에 그 이름을 알렸다. 그의 시 <십자가>에서 보듯 순교의 길을 갔지만 그는 저항 시인으로 당당히 부활했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중국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당시 명동촌은 민족 교육의 산실이었다. 한반도를 벗어나 북간도에 들어간 윤동주의 부모 세대는 이곳에 정착했다. 명동촌은 또 기독교를 받아들여 신분의식을 타파하고 평등주의를 추구한 이상적인 기독교 공동체였다. 명동촌의 윤동주 세대는 당대 독립 운동의 성과와 좌절을 실시간으로 접하면서 민족 의식을 키웠고 기독교 사상의 세례를 받았다. 열다섯에 시를 쓰기 시작한 그는 이 무렵 첫 작품으로 <삶과 죽음>, <초한대>를 남겼다. 윤동주의 짧은 생애에서 그가 가장 행복해 한 시간은 연세 동산에서 공부하고, 고뇌하고 사색한 4년이었다고 한다. 그가 다닌 1930년대 후반의 연희전문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의지가 충일한 민족정신의 보루였다. 진리와 자유, 인간의 존엄성을 가르치던 기독교 교육의 본산이었다. 우리의 연세 동산에서 윤동주는 저항 정신과 더불어 <서시>에 드러난 생명 존중의 정신을 내면화했다. 윤동주는 1941년 12월 27일 전시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연희전문을 졸업했다. 이듬해 모국어도, 제 이름 석 자도 허락되지 않던 조국을 떠나 일본 유학길에 올라 릿쿄대 영문과를 거쳐 도시샤대 영문과에 재학했다(도시샤대에 1995년 윤동주 시비가 섰고, 릿쿄대에도 시비가 생긴다고 한다). 그 후 학업을 중단하고 귀향하려던 중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제 경찰에 체포된다. 그리고 광복을 반년 앞둔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숨을 거뒀다. 2년의 형기 중 다섯 달을 남겨뒀을 때였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약물 주사를 맞은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간수의 증언에 따르면 마지막 순간 그는 모국어로 큰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윤동주의 시 <길>의 7연)

그는 독립운동가라기보다 순수한 서정시인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당시 판결문에 따르면 그는 지하 독립운동 단체에 가담하거나 좌익 계통의 운동에 직접 투신한 사실이 없다. 더욱이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달리 자신이 쓴 많은 원고와 일기를 보관하고 있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사랑한 순수한 영혼마저 불령선인(不逞鮮人 :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는 뜻으로, 일제 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자기네 말을 따르지 않는 한국 사람을 이르던 말)으로 낙인찍던 반역의 시대가 그를 저항 운동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세상이 이러한데 시가 쉽게 쓰여진다는 거,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어?”(2016년 개봉한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를 연기한 강하늘의 대사) 하기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시대엔 순수성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저항의 표현이다.

이필재 (신방 77입) 이코노미스트 인터뷰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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