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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이야기] 전라도 표준어(?)를 구사하는 파란눈의 순천 촌놈, 인요한 세브란스 국제진료센터 소장
등록일: 2019-09-02  |  조회수: 6,038

190cm가 넘는 큰 키에 높은 콧대, 노란 머리색과 파란 눈동자를 가진 인요한(의학 80입) 교수는 전라도 순천에서 태어난 한국인이다. 한국형 앰뷸란스를 최초로 개발한 서양인 의사, 외국인 최초 국가고시 합격, 특별귀화 1호 등 수많은 1호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며, 외모와 달리 구수한 전라도 표준어(?)를 구사하며 스스로를 순천 촌놈이라 부른다. 30여 년 간 세브란스 국제진료센터 소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순천 ‘인’씨의 시조 인요한 교수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1백30년 간 이어온 한국 사랑의 시작 언더우드, 알렌이 한국에 온지 10년 후인 1895년 미국 남장로회의 선교사인 ‘유진 벨’이 선교를 위해 한국에 파송된다. ‘유진 벨’은 광주에 수피아여학교와 숭일학교를, 목포에 정명학교와 영흥학교를 세우며 선교와 교육에 힘쓰게 된다. 이분이 인요한 교수의 진외증조부로 5대째 한국사랑을 실천하는 린튼가의 시작이었다. “처음 선교를 할 때 예배당에 나오는 사람은 2% 정도였습니다. 그중 30%가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각 예배당은 그야말로 독립운동은 초소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선교사들은 본인들이 존경을 받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예배당을 다니는 그들을 존경한다고 말했습니다.” ‘유진 벨’의 사위이며 인요한 교수의 할아버지인 ‘윌리엄 린튼’ 역시 의료봉사와 선교를 위해 1912년 한국에 들어와 교육사업에 헌신한다. “3.1 운동을 직접 목격한 할아버지는 그 잔혹한 상황을 애틀랜타 평신도 대회에 참석해 생생하게 묘사하였습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총에 맞고 총검에 찔렸으나 민주주의를 원하며 무폭력으로 저항한 3.1운동을 미국에 알려 연합군에게 도와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윌리엄 린튼은 이 공로로 애족훈장을 수여 받았다. 그 후로도 계속해서 교육사업에 헌신하던 윌리엄 린튼은 끝까지 일본의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출국당했다가 다시 돌아와 한남대학교를 세웠다. “할아버지는 신사참배를 하지 않기 위해서 학교문을 닫았습니다. 당시 할아버지는 ‘나는 일본이 무섭지 않다. 다만 학부모가 무섭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윌리엄 린튼’의 자녀이자 인요한 교수의 아버지인 ‘휴 린튼’은 군산에서 태어나 평생 결핵 퇴치 운동에 앞장섰다. 또, 한국전쟁당시 군대에 자원하여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다. 인요한 교수의 형인 ‘스티븐 린튼(인세반·철학 73입)’은 1997년부터 인 교수와 함께 북한 결핵퇴치 지원사업을 시작해 20년 넘게 북한 결핵 퇴치를 위해 힘쓰고 있다. 인세반 동문은 현재 대북지원단체인 ‘유진 벨’ 재단의 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조상들과 달리 나는 한국과 모교에 많은 빚을 졌다 “제가 조상들의 얘기를 자랑하듯 하는 이유는 조상들은 많은 기여를 했는데 정작 나는 한국에 도움을 준 사람이 아니라 도움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저는 1980년 모교의 배려로 외교관, 재일, 재미교포와 함께 시험을 봐서 의과대학에 정원외 입학을 해서 의사가 되었습니다. 둘째, 1991년 세브란스에 제일 젊은 부소장으로 와서 29년째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2012년 3월 외국인 최초로 한국에 특별귀화를 했습니다. 한국과 모교인 연세에 이렇게 많은 빚을 졌으니 이제 무엇으로 그 빚을 갚을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요한 교수는 많은 빚을 졌다고 하지만, 노력 없이 거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외국인 최초로 우리나라 의사고시에 합격하며 서양인 국가고시 1호가 되었고, 미국 유학 당시 이름도 모르는 나라에 이름없는 대학을 나왔다고 동료들에게 설움을 받았지만 시험에서 전체 1등을 차지하며 실력을 증명했다. 또 그는 외국인 신분으로 자원입대하여 군생활도 하게 되었다. “의예과 1학년 때 휴교를 하고 고향인 순천에 내려와 있었는데 5.18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기자회견에서 통역을 하게됐고, 그 일로 인해 주동자로 몰려 한동안 쫒기는 생활을 했습니다. 감시당하고 쫒기는 생활이 힘들어서 도피하듯이 군대에 입대해서 각개전투도 하고 훈련도 받으며 군생활을 했습니다.”

연세가 세계 최고의 의료기관이 되기를 1984년 인요한 교수의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음주운전을 하던 맞은편 버스에 치여 옮길 차가 없어서 순천에서 광주로 가던 중 택시 뒤에서 운명하였다. “1992년에 아버지 친구분들이 모금을 해주셨습니다. 다시는 아버지처럼 죽는 사람들을 만들지 말자는 생각에 뒷마당에서 한국형 앰뷸런스를 만들기 시작해 1995년 다섯 대의 앰뷸런스를 완성했습니다.” 인요한 교수는 앰뷸런스 개발 등 한국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2012년 특별귀화하여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인요한 교수의 마지막 바람은 세브란스를 중심으로 세계적인 의료 한류를 일으키는 것이다. 인요한 교수가 소장으로 있는 세브란스 국제진료센터는 작년 외국인을 상대로 5백억 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근래에 ‘티비는 사랑을 싣고’, ‘대화의 희열’, ‘집사부일체’ 등 많은 티비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바쁜 중에도 티비 출연을 하는 이유에 대해 그는 “한국인이지만 외국인의 외모를 가진 제가 방송에서 한국 의료의 훌륭한 점을 홍보 하는 것이 국제적으로 조금이라도 효과가 있지 않을까 해서 입니다”라고 말한다. “한국인들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쇠젓가락을 사용하는 민족입니다. 그래서인지 의사들 특히 외과의사들의 손재주가 대단합니다. 머리좋고 솜씨좋은 의사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실력은 물론 장비까지 겸비한 한국 특히 세브란스는 앞으로 받드시 세계 최고의 의료기관이 될 것입니다.”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마라 “루즈벨트는 ‘두려움은 두려움 자체가 문제다.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얘기했습니다. 우리 연세인들 역시 앞장서 나가는데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연세의 미래는 굉장히 밝습니다. 우수한 인재들인 우리 연세인들이 다가올 미래에 비전과 철학을 가진 글로벌 지도자로 우뚝 설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인요한 교수는 동문들의 모교 사랑을 당부했다. “그동안 많은 동문들이 모교에 많은 기부와 사랑을 보내준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학교 재정이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동문들이 십시일반 힘을 모아주시기를 부탁합니다. 큰 기부자보다는 작게 많은 사람이 기부하는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동문들이 모교를 마음에 두고 힘을 모아주기 바랍니다.” 130여 년간 한국을 사랑해온 그들의 마음처럼 연세인의 모교 사랑이 계속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백진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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