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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한국전쟁, 그 고난과 혼란 속에서도 학교를 지키고 후학을 교육하기 위해 노력한 연세!
등록일: 2019-06-04  |  조회수: 181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인 38선을 불법 남침하면서 일어난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와 표현할 수 없는 피해를 남겼다. 북한군이 남침했으나 정부는 국민들에게 안심하라고만 안내하였다. 이에 따라 모교는 6월 27일까지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수업 중에 서울 상공에 적기가 날아와 공중전이 일어나고 대포 소리가 들리자 수업을 중지하고 교수회의를 열어 휴업하기로 했다. 바로 다음 날 새벽 북한군이 서울에 들어오면서 모교도 북한군이 점령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해 김윤경 총장 대리는 연희대학교 총장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6월 26일 북한 괴뢰군이 38선 전면에 걸치어 남한으로 침입하게 되고 6월 28일에 서울이 점령되자 본 대학교도 역시 괴뢰정권의 점령 지배한 바 되어 폐허에 가깝도록 손해를 받게 되었다.’

학교를 지키기 위해 자위대 조직 이 일기에는 학교가 북한군에 점령당하자 모교 교직원들은 학교를 지키기 위해 자위대를 조직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군에 의해 학교는 유린당하게 된다. 제일 먼저 파괴된 것은 언더우드 동상이었다. 학교를 점령한 공산군은 밧줄로 동상을 쓰러뜨렸다(현재 동상은 1955년 세워졌다). 학교의 여러 비품은 물론 도서관과 박물관에 보관되었던 귀중한 도서와 문화재도 도난되었다.  학교는 1950년 9월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하는 과정에서도 큰 피해를 받았다. 시내 중심가에 있던 세브란스병원은 입지 조건 때문에 피해가 컸다. 치열한 시가전 끝에 세브란스 병원에 잠복한 공산군을 축출하기 위한 집중 포격으로 건물과 시설의 대부분이 잿더미가 되었다. 신촌캠퍼스도 북한군 전투사령부가 주둔하고 있었기에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본관 2층이 소실되고, 스팀슨관과 한경관, 이학관의 일부가 파괴되었으며, 원한경 박사 사택도 피해를 당했다.

서울 수복 한 달 만에 개강 서울이 수복되자 교직원들은 파괴된 학교를 복구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특히 정석해 문과대학장과 강만유 총무처장의 힘이 컸다. 이에 대해 김윤경 총장 대리는 9월 21일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괴뢰군이 쫓기어 간 뒤로 부근에 거주하던 정석해 학장과 강만유 총무처장은 난잡한 교내 정리와 도난 방지와 반역자 행위 조사에 노력하여 그 공이 적지 않았다.’ 이런 노력 끝에 모교는 11월 3일 노천극장에서 개강식을 가졌고, 6일부터 수업을 시작했다. 개강 초기 90명 정도 등교했으나 차츰 늘어 1백39과목에 수백 명이 수업을 들었다. 이 무렵 다른 대학들은 단독으로 개강하지 못하고 연합해서 개강했다. 그러나 강의는 지속하지 못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이 후퇴하게 되면서 학교는 긴급회의를 열고 다시 휴교를 결정한 후 12월 6일 학생들에게 알렸다. 그러나 학교를 바로 포기하지는 않았다. 원한경 명예 총장은 물론 김윤경 총장대리, 강만유 총무처장과 일부 교직원들은 남아 학교를 지켰다. 결국 유엔군이 서울에서 후퇴하게 되자 학교에 남아 있던 교직원 등은 다시 피난길에 오르게 된다. 부산에 단독 개교 전쟁이 지속되는 가운데 1951년 정부는 교육특별조치요강을 제정했다. 그에 따라 대학생들은 부산과 광주, 전주, 대전 등의 도시에 설치된 전시연합대학에서 4월부터 수강하게 되었다. 모교 교수들도 각 전시연합대학에서 강의하였으나 불완전한 전시연합대학보다는 단독으로 개교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이에 여러 곳을 물색하다가 부산 영도 신선동3가 748번지에 천막 5채를 치고 학교를 개교했다. 개교 당시 1백14과목이 개설됐으며, 강의는 김윤경‧정석해‧한영교‧조의설‧민영규‧신동욱‧심인곤‧박상래‧지동식‧고병려‧장기원‧이정호‧이영우 교수를 비롯해 Payne‧최호진‧이환신‧이경호‧장경학‧이한빈‧홍윤명‧김진배‧이철주‧김호직‧이원철 강사가 수업했다.

10월 3일 개강식에는 김윤경 총장대리, 정석해 문과대학장, 조의설 상경대학장, 장기원 이공대학장, 한영교 신과대학장, 신동욱 교무처장, 박상래 학생처장, 이영우 교무과장, 강만유 총무처장이 함께 했다. 난방시설도 없는 천막에서 겨울을 보낸 모교는 국제연합의 원조를 받아 목조 교사 건립을 추진했다. 부산 영도 영선동4가 200번지 8백45평을 구입하고, 인접한 시유지를 부산시로부터 임대받아 학생들과 함께 목조 교사를 세웠으며, 1952년 5월에는 낙성식을 가졌다. 앞서 4월에는 82명이 졸업했다.

전란 속에도 학문탐구 계속 어려운 여건 속에도 연세의 학문탐구는 계속됐다. 1957년 7월에는 목조 교사 낙성을 기념하며 국어국문학 관계 자료 및 극동제민족 언어관계자료 특별전시회를 열었다. 특히 민영규 교수는 1952년 10월 6일부터 11월 6일까지 경상도 일대의 사찰을 답사하며 전란으로 인한 문화재의 실태를 조사하기도 했다(모교 박물관은 당시 기록들을 7월 31일까지 1층 기획전시실에서 전시하고 있다). 같은 해 10월에는 사학과에서 제1회 ‘사학대회’를 개최했다. 대학 자체에서 사학대회를 개최한 것은 처음으로, 조의설‧민영규 교수를 비롯해 대학원생으로 이광린‧이옥‧이영숙 학생의 연구발표가 있었다. 신과대학에서는 <신학논단>을 1953년 5월에 창간하고, 상경연우회에서도 <경제학총>의 창간호를 6월에 출판하는 등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각종 발표회와 강연 등을 지속했다.

61년 만에 돌아온 연희전문 교기 한국전쟁으로 모교 연세가 입은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특히 학교의 상징인 교기조차 챙길 수 없이 급박한 상황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 해병대 소대장으로 참전했던 레이 르 피버씨는 서울수복작전의 격전지였던 모교 부근에서 교기를 발견하게 된다. 전쟁 기념품으로 생각하고 교기를 가져간 피버씨는 2011년 모교에 교기를 반환했다. 61년 만에 다시 연세의 품으로 돌아온 교기는 월계수 잎사귀 가운데 붉은 십자가 문양을 그려 넣은 것으로 십자가를 사용하지 못했던 1940년대 교기로 추정된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거의 대부분이 파괴된 모교는 전란 속에서도 연세를 지키기 위한 여러 스승과 선배들의 헌신적인 노력을 통해 회복하고 발전하였다. 이처럼 ‘진리와 자유’를 향한 연세의 발걸음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정리 박원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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