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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4·19 혁명, 1960년 4월 19일 피의 화요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불꽃이 타오르다
등록일: 2019-04-09  |  조회수: 217

“당시 학생들은 일제식민지와 6.25를 겪어 가난했지만 20대의 패기와 의협심이 있었습니다. 당파 싸움만 하고 있는 지도자들에 대한 불만도 많았기에 ‘사회를 한 번 정화해야 되지 않겠느냐’라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죠. 자유당은 부정선거를 자행하고, 집권유지를 위해 경찰은 물론, 화랑동지회, 반공청년당 등의 이름을 가진 소위 조폭과 같은 단체들을 통해 학생들을 감시하고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3.15 부정선거로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부통령이 당선되고, 마산에서 부정선거 반대 시위도중 김주열 학생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다.
“부정선거 후 시내 각 27개 대학의 학생회장들과 매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사회개혁을 위해 뛰어나가야 할 것은 우리 학생들이다’라며 부정선거와 김주열 학생의 죽음에 분노했습니다. 총기발포가 예상되니 많은 학생들이 한 번에 모여 정부가 손을 대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각 대학의 학생들은 4월 19일에 결의하기로 동의했고 분담하여 플래카드, 전단지 등을 만들었다.
“이틀 전인 4월 17일 미행을 따돌리고 조우현 학생처장의 관사를 밤중에 찾아가 19일에 데모를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조우현 학생처장은 가만히 듣고 계시다가 ‘시대가 요청하면 해야지’라고 하시더군요. 학생들이 출석 등 불리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백낙준 총장에게도 학생들의 이런 상황을 알려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약속된 19일 전인 18일 고려대 학생들이 갑작스럽게 먼저 행동에 나섰다. “각 대학이 4월 19일로 동의했는데, 운동장에서 며칠씩 신입생 환영회를 하던 고대 학생들이 전날 급작스럽게 시위에 나섰습니다. 학생회에서 주도한 것은 아니었고, 학교 앞에 진을 치고 있던 탱크와 군인들에게 자극을 받은 4~5백 명의 학생이 들고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19일은 마침 채플이 있는 화요일이어서 채플이 끝나는 12시에 대강당에 모이기로 했다. 아침 6시 여학생회관 ‘논지당’에 각 단과대학 학생회 회장, 총학생회 간부 및 유도, 태권도, 럭비부 대표 등이 모여 결의문에 연판장을 지장으로 찍고 12시에 대강당에 모였다.
연세 학생 3천여 명은 ‘우리 자손의 건전한 번영과 행복을 위하여 선두에 나설 것’을 결의하고, 평화적인 학생 시위운동에 돌입했다. 모교 시위대는 신촌 로터리에서 경찰 기동대와 1차 충돌이 있은 후 홍익대생과 합세하여 서대문 로터리로 향했다.
“당시 홍익대는 학생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전에 홍익대 학생회장과 만나서 행진하기로 약속을 해 두었습니다.”
광화문 쪽으로 진행하려던 도로가 차단되어서 서울역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의과대학생들과 합류했다.
백색으로 군중의 시각을 자극시킨 의과대학 학생들은 구호에서도 특이성을 나타냈다. ‘의학도여, 메스를 들라! 썩은 정치를 수술하자’는 것이었다.
약 30분간 연좌시위를 한 학생들은 다시 무교동과 화신 앞을 거쳐 종로 4가 돈화문 앞에 이르렀다. 이때 경무대 앞에서 발생한 발포로 30분간 지체하다가 2시50분에 안국동 로터리를 지나 시위를 계속하여 중앙청 방면으로 진행하려 할 때, 소총 사격으로 선두는 후퇴하고, 학생들은 보도에 주저앉아 사격 중지를 요구하며 무저항으로 농성했다.
여기서 경찰의 실탄사격으로 김흥수 동문(행정 58입)이 관통상을, 고흥우 동문(법학 57입)이 부상을 입고 졸도했으며, 의예과 2학년이었던 최정규 동문(왼쪽 사진)이 안타깝게 사망했다.
학생들은 안국동, 종로, 남대문, 서울역, 서소문을 거쳐 5시15분에 학교에 돌아와 대강당 앞에 다시 모였다. 3천여 명의 학생들은 학교에 돌아와서도 피곤을 모른 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대강당 정문 앞에 집합하여 애국가를 불렀다.
“시위를 마치고 학교에 돌아오니  백낙준 총장과 최현배 부총장 등 2~30명의 교수들이 계단에서 학생들을 맞아주었습니다. 박수치며 학생들을 격려해주는 교수님들을 보니 피곤이 풀리더군요.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발톱이 빠지고 피가 나긴 했지만 마음만은 뿌듯했습니다.”
4·19 학생들의 시위로 이기붕의 은퇴를 발표했지만 동시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령에도 연세의 진리와 자유를 위한 행동은 20일, 21일에도 계속 이어졌다.
“학생들은 계속해서 시위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경찰의 수는 많아졌고, 많은 학생들이 체포되었습니다. 저도 경찰에게 잡혔는데 당시 시내 유치장에 자리가 없어서 성북동에 있는 유치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교수님들이 경찰서로 찾아와 저를 비롯해 많은 모교 학생들을 꺼내주었습니다.”
이후 거리에 불을 지르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지자 모교 학생들은 자체적으로 수습반을 결성해 질서유지를 위해 노력했다.
학생들의 시위에 이어 4월 25일 이승만 정권의 만행에 분노한 서울 시내 각 대학 교수단 2백여 명은 선언문을 채택하고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했다. 4월 26일에도  서울 시내를 가득 메운 대규모의 군중들은 정권의 무력에도 굽히지 않고 더욱 완강하게 투쟁했고, 결국 이승만은 4월 26일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력직에서 사임하겠다’고 발표하고 대통령직에서 하야했다. 12년 간의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주권이 회복된 순간이었다. 4·19혁명에서 순국한 최정규 열사는 수유리에 있는 국립 4·19 민주묘지에 안장되었다. 모교는 최정규 열사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65년 2월 명예 졸업증서를 수여했다. 1960년 학생과 시민을 중심으로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켜낸  4·19 혁명이 올해로 59주년을 맞았다. 그 혁명의 중심에서 진리와 자유를 실천하여 민주주의의 불꽃을 피워낸 연세의 정신이 언제까지나 뜨겁게 타오르길 기대한다.
  정리·백진열 기자

<철학자 정석해 그의 시대, 그의 사상> 중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4·19 당시 연세대의 대열에 섞여 있었지만 뒤섞인 데모 대열을 따라 잡을 수 없었다. 시위 행렬의 목적이 경무대 앞일 것 같아 동료 세 분과 경무대로 향한다. 앞선 데모 대원들이 경무대로 돌진하려다 경찰의 총격을 맞아 쓰러졌다. 안국동에서 내려올 연세대 데모대의 행진을 저지시키려 했으나 20여 분간 경찰의 포화가 계속됐다. 흰 가운을 입은 의과대학생들이 총탄에 쓰러진 학우들을 병원에 나르느라 애쓰고 있었다.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학생들을 찾아가보니 차마 보지 못할 정경이었다. 마음속에서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는 생각이 들었다.
24일 고려대 이종우 교수의 집에 모인 교수들은 25일 궐기대회를 열기로 의견을 합했다.
권오돈 교수와 함께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서 열릴 교수결기대회를 준비했다. 성명서 발표만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갈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교수들도 학생들같이 데모를 해야 민중의 호응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믿었다. 2백여 명의 교수가 모였고, 교수궐기대회의 임시의장을 맡아 3시부터 회의를 진행했다. 각 대학의 교수들과 함께 시국선언문을 작성하고, 데모를 하자고 제의했다.
5시45분 모든 교수가 거리에 나섰다.‘각 대학 교수단,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문구를 플래카드에 쓰고 모교 권오돈 교수가 선두에 섰고, 태극기를 들고 뒤를 따라 행진했다.  종로5가에서 화신 앞으로 진행하는 동안 거리 거리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어 양편에서 대열을 호위했고, 차량들은 길가에 멈추어 주었다. 교수단은 ‘대한민국 만세, 이 대통령 하야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계엄령 하에서 감행하는 것으로, 평화롭고 질서있는 시위가 되어야 했기 때문에 대열에 합세하려는 시민들을 막으면서 진행했다. 오후 7시 경 국회의사당앞에서 시국선언문을 다시 한 번 낭독하고 해산하였지만 거리에는 군중들이 더 모였다. 탱크와 군인들은 밀물처럼 늘어난 데모대 군중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고, 25일 밤 광화문 네거리에서 서대문 쪽으로 끊임없이 계속된 데모행렬은 26일 아침에도 그칠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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