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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이야기] 세상을 바꾸는 연세인들 ⑩ - 김형석 모교 명예 교수(1)
등록일: 2021-04-13  |  조회수: 6,016

김형석 모교 명예 교수는 1947년 월남해 신촌기차역 앞에 부엌도 없는 단칸방을 얻었다. 겨울을 앞두고 부인과 연세대 뒷산 안산에 올랐다. 땔감으로 쓸 솔방울을 줍기 위해서였다. 내려오는 길에 산 관리인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가 솔방울을 두고 가라고 하자 부인이 나섰다.
“그냥 가져가게 해 주세요. 길가에 두고 간들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관리인이 “절대 다시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당시 중앙고 교사로 있던 김 교수는 그로부터 7년 후 모교 조교수로 부임한다. 고려대에서 오라고 했지만 고 백낙준 초대 총장의 권유를 받고 우리학교에 몸담았다. 산 관리인에게 다시 오지 않겠다고 한 약속은 결국 지키지 못한 셈이다. 그는 “우리학교는 기독교정신을 바탕으로 학문을 하고 민족을 이끄는 대학”이라고 말했다.

-연세정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기독교정신 곧 인간애라는 주춧돌 위에 세운 진리와 자유라는 두 기둥입니다.”
그는 언더우드 선교사 가문이 세웠지만 우리 졸업생들의 힘으로 선교사 대학에서 벗어났고, 과거 큰 대학을 지향할 거냐 작은 대학을 지향할 거냐의 방향성을 놓고 고민했지만 오늘날 민족의 대학으로 우뚝 섰다고 말했다.

-기독교정신이 여전히 우리 사회를 이끌고 있다고 보십니까?
“기독교정신과 교회의 전통 및 인습은 서로 다릅니다. 기독교정신은 여전히 우리 민족의 희망이지만 교회의 인습은 그렇지 못하죠. 유럽의 교회들이 대부분 문을 닫았지만 유럽엔 기독교정신이 살아 있습니다. 유럽 교회가 문 닫은 건 기독교정신을 버린 탓이죠.”
그는 우리학교에 두 개의 좁은 문이 있다고 말했다. 교수 등용에 대해 동문 여부와 크리스천 여부가 일종의 관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많이 탈피했지만 비동문·비기독교인에 대해 배타적인 분위기가 여전히 있다는 것이다. “학문의 높이와 인격이 기준이 되어야죠. 미국의 하버드대·시카고대 출신은 우수하더라도 거의 모교에 몸담지 않습니다. 대학이 너무 동질적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죠. 자칫 온정주의에 빠질 수도 있고요.”
모교 재직 시절 그는 연희동 집에서 청송대를 지나 출퇴근을 했다. 안산 산책도 자주 했다. 지금도 되도록 많이 걷는다는 그는 걸으면서 생각을 많이 한다고 했다.

-교수님은 우리나라 시니어들에게 인생 2막 롤모델 같은 분이십니다. 평소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십니까?
“나이가 들면 생활이 운동이 돼야 합니다. 500~600미터는 항상 걷고, 매일 1킬로미터는 걸으려 합니다. 집에서는 2층의 내 방을 수시로 오르내리는데, 2층집에 사는 복이죠.”
평안남도 태생인 그는 이북에서 축구와 스케이팅은 기본으로 했다고 말했다. 모교 재직 시절 문과대 교수축구팀 주장도 했다고 했다.
“교수들이 축구 경기를 몇 명이 하는지도 몰랐어요. 쉰쯤 됐을 때 아흔까지 계속할 수 있는 가벼운 운동을 찾다 수영을 했어요. 30년 이상 했는데 상당한 도움이 됐습니다. 정구는 상대가 있고 시간을 맞춰야 해 배제했죠.”
그는 수영은 관절에 좋고 전신운동이라 몸의 균형을 잡아 준다고 말했다. 2년 반 전 나와의 인터뷰 때 그는 “수영을 한 덕에 관절에 문제가 없어 지팡이를 짚지 않는데 내년(2019년)엔 짚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했었다. 이번에 우리 동문회관에서 만났을 때 그는 지팡이 없이 꼿꼿한 자세로 걸어왔다.
올해 만 101세인 그는 여전히 집필과 강연을 한다. 두 신문에 3년째 칼럼을 쓴다. 80여 분 간 인터뷰하는 동안 1970~80년대 그와 함께 철학계 삼총사로 불린 고 안병욱 숭실대 교수, 고 김태길 서울대 교수 등 여러 사람의 이름을 소환했다.

-기억력을 유지하시는 비결이 뭡니까?
“인생과 학문에 대해 사색과 사고를 많이 하는 덕인 듯싶어요. 나는 제자들 이름은 잘 기억 못해요. 보통 고유명사, 보통명사, 형용사, 부사, 동사 순으로 잊어버린다고 합니다. 사색을 많이 하면 인명, 전화번호 등은 잘 입력이 안 되지만 고정관념에 잘 빠지지 않게 되죠.”
그는 50대가 되면 기억력이 감퇴하지만 사고력은 오히려 높아진다고 말했다. 사회지도자도 60대에 많다고 덧붙였다.
“97세 때 어디서 우리나라의 문장가 열 명을 뽑았는데 나를 제외하면 모두 50대 후반에서 60대 초였습니다. 50대 이후 기억력이 떨어졌지만 사고력이 높아졌기에 그 틈에 끼인 거죠.”

-만일 다시 대학생 시절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해 보시고 싶습니까?
“책을 많이 읽고 수준 높은 토론에 참여해 보고 싶습니다. 대학생은 모름지기 문제의식이 있어야 해요. 학문도 문제의식에서 시작됩니다. 나 나름의 인생관과 사상을 정립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어떤 책을 권하시겠습니까?
“고전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의 창세기와 요한복음 또는 마가복음, 논어 그리고 벤저민 프랭클린과 알버트 슈바이처의 자서전, 에이브러햄 링컨 전기 등을 권합니다.”
그는 기업체 과장이나 과장급 공직자까지는 고전을 안 읽어도 일할 수 있지만 더 올라가면 정신적 빈곤을 느끼게 될 거라고 말했다.

-요즘 어떤 것들에 관심을 두십니까?
“오늘날의 기독교가 우리 역사에 어떤 긍정적·부정적 영향을 끼쳤는지 돌아봤습니다. 기독교정신은 살려야하지만 교회에 집착할 필요는 없어요.”
지난해 10월 펴낸 <기독교, 아직 희망이 있는가?-100년 후에도 희망이 되는 기독교를 위하여>에 그는 “성직자가 교인을 대할 때 권위의식을 버려야 한다”고 썼다.
“교인 역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이나 사회인을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비판하는 권위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1985년 그는 모교에서 정년퇴임했다. 31년 재직했다. 고별강의를 하기로 한 날 학생들이 격렬한 반정부데모를 했다. 동료교수들이 연기하자고 했지만 그는 “청중이 많이 안 모이면 어떠냐”며 강행했다.
강의 시간인 오후 2시가 되자 인문관에서 가장 큰 강의실이 가득 찼고, 일부는 서서 들어야 했다. 기자들도 취재하러 왔다. 80분 간 그가 강의하는 동안 최루탄 가스 탓에 학생들은 재채기를 했고 더러 눈물도 흘렸다.
“감격적이었습니다. 내가 연세대에서 실패하지는 않았구나 했던 생각이 나요.”

-한국 철학사 내지는 한국 철학계에 어떤 족적을 남기시고 싶습니까?
“젊어서는 칸트나 헤겔 같은 철학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습니다. 막상 해 보니 그런 그릇이 못 됐죠. 나는 뿌리가 되고 제자들이 나무 밑동, 그 제자들이 가지가 되어 열매를 맺는 꿈을 꿉니다. 내가 할 일은 철학의 생활화, 올바른 가치관을 제시하는 거라고 봅니다. 1960년대 이래 30~40년 안병욱·김태길 선생과 함께 어느 소설가·시인보다 가치관에 대한 영향력이 컸다고 봅니다. 나름대로 시대의 책임을 다했다는 생각입니다.”
세 사람은 1920년생 동갑이고, 다른 두 사람은 아흔 안팎에 세상을 떠났다.
“안 선생이 생전에 나더러 ‘김 선생은 정신력이 강해 우리보다 오래 살고 일을 많이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신력이란 신앙인으로서의 자세를 이야기한 거죠. 몸은 쇠약해져도 정신력은 유지할 수 있습니다.”
김 교수는 앞으로 2년은 더 활동할 수 있을 거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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