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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이야기] 인물로 보는 연세 150년 ③ - 언더우드 설립자
등록일: 2020-04-28  |  조회수: 7,458

‘하나님의 대언자, 그리스도의 제자, 한국의 친구(MESSENGER OF GOD, FOLLOWER OF CHRIST, FRIEND OF KOREA)’ 우리 학교 신촌 캠퍼스 언더우드 동상 좌대에 새겨져 있는 영문 글귀이다. 백양로 끝에 자리잡은 언더우드관(옛 본관, 사적276호) 앞에 있는 이 동상은 예나 지금이나 연세인들이 졸업식과 입학식 때 기념사진을 가장 많이 찍는 곳이다. 연세의 설립자 언더우드는 기독교 선교사로 이 땅에 들어와 평생 예수의 제자로 살았고 한국인의 영원한 친구가 되었다. 그의 동상은 연세 동산에 세 번 세워졌다. 1928년, 광복 후인 1948년 그리고 1954년 조각가 윤효중이 제작한 지금의 동상이다. 첫 동상은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 중 포탄을 만든다고 일제가 뽑아갔다. 두 번째 동상은 한국전쟁 중 서울을 점령한 북한 인민군이 파괴했다.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원두우)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개신교 첫 선교사로 조선에 입국했다. 1915년 그는 연희전문학교의 전신인 조선기독교대학을 설립했다. 연희전문학교는 그 후 연희대학교로 개명했고 1885년 설립된 제중원(濟衆院 : 설립 당시엔 광혜원·廣惠院)을 모태로 하는 세브란스의과대학과 1957년 통합돼 오늘의 연세대학교에 이른다. 언더우드는 토론토 의과대학 교수로 있던 에비슨에게 한국 선교사로 지원하도록 권했고, 그가 제중원의 책임자를 맡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에비슨은 자신의 전임자와 조선 정부 간의 갈등으로 야기된 제중원의 위기를 타개했고, 1916년 언더우드 서거 후 연희전문 2대 교장에 취임했다.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의대는 서로 통합되기에 앞서 두 사람의 우정으로 얽혀 있었던 셈이다. 서울장신대 총장을 지낸 민경배 전 모교 신과대학장은 “연세대는 언더우드 개인의 피와 땀 그리고 기도로 세워진 대학”이라고 말한다. 언더우드의 연세 창립 정신은 실제로 연세의 학풍으로 이어졌다. 첫째, 그는 당시 대학을 서울이 아니라 평양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 다수의 선교사들에 맞서 자기 뜻을 관철하는 불굴의 정신을 보여줬다. 단 하나의 교파연합 기독교 대학을 한국에 설립한다면 대부분의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재학 중인 수도 서울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가훈은 “불가능을 일소에 부치고 무엇이든 반드시 될 수 있다고 말하라”였다. 둘째, 그는 전도사와 교사를 양성하는 한편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으로 직업교육을 병행했다. 또 연희전문을 설립할 때부터 상학을 주요 전공으로 결정했다. 셋째, 섬김의 정신이다. 그는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에게서 깊은 신뢰를 받았지만 복음 전파와 사회적 약자를 섬기는 일에 주력했다. 고종은 그를 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넷째, 특정 교파와 교단의 이해관계에 매몰되지 않은 에큐메니칼(Ecumenical) 정신이다. 그는 장로교회, 감리교회, 성공회 등 각 교파의 정체성과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열린 자세로 일치와 연합을 향해 나아갔다. 1916년 언더우드는 몸이 쇠약해져 요양차 미국에 갔다 57세에 거기서 영면했다. 그로부터 80여 년이 흐른 1999년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부인, 한국에서 낳은 아들 원한경 내외와 함께 누워 있다. 일찍이 언더우드 추모식에서 에비슨은 이렇게 연설했다. “연세의 발전은 그 자체가 그를 기념하는 일이고 앞으로 연세가 한국의 사상과 사회에 미칠 영향력이 그의 영광스런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영국에서 태어난 그가 미국인이 된 건 과학자이자 발명가였던 그의 아버지가 동업자의 사기로 사업에 실패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뉴욕대를 나와 브론스윅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당초 인도 선교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었다. 인도에서 사역하기 위해 1년 간 의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 후 일본과 중국 사이에 있는 조선도 선교사를 필요로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조선 선교를 후원할 교회도 기관도 찾을 수 없었다. 신학교 졸업 후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뉴욕의 한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았다. 청빙을 수락하는 답장을 써서 우체통에 넣으려는 순간 미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조선에 가는 사람이 없다면 조선은 어떻게 되겠느냐?” 그는 편지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하고 응답한 그가 장로교 선교본부를 찾았을 때 때마침 맥 윌리엄스라는 평신도가 조선 선교를 위해 써 달라고 6천 달러를 헌금했다. 한 선교사 가정이 5년 간 사역에만 매달릴 수 있는 큰돈이었다. 조선으로 떠나기로 마음먹자 형제들이 그가 영국의 고향을 방문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그가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가족과 함께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그가 벼르던 인도 행을 포기하고 조선 땅을 밟은 건 우리 학교로서는 커다란 행운이었다. 언더우드는 1886년 고아원과 고아학교도 설립했다. 국내 첫 고아원과 둘째 학교였다. 상해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김규식이 여기서 자랐다. 언더우드학당이라고 불린 이 학교가 경신학교의 모태이고, 경신학교의 후신이 경신중고등학교이다. 경신학교 대학부가 연희전문학교의 원형이다. 그는 또 국내 첫 정규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의 전신 정동장로교회를 창립했고, 뛰어난 한국어 실력으로 한국어사전 등을 출판했다. 무엇보다 그는 국적, 계급, 지위, 종파를 떠나 만인에게 형제애를 보여준 참 기독교인이었다. 언더우드의 아들로 훗날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지낸 원한경의 첫째는 해병대에 입대해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했고 막내아들도 육군에 입대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당시 한국에선 찾아볼 수 없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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