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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칼럼] 전염병 유행 속의 세브란스
등록일: 2020-04-28  |  조회수: 351

작년 가을,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 감염증이 어느새 세계적으로 유행하여 인류의 건강을 위협하는 큰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과거 세브란스는 이처럼 전염병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가운데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를 돌이켜 살펴보는 것도 적지 않은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간 한국 사회에서 크고 작은 전염병이 유행했으나 이 글에서는 1895년 유행한 콜레라와 요즘 많이 언급되고 있는 스페인 독감 유행시 세브란스에 관련해 간략히 정리했다. 콜레라 맞선 에비슨 박사 위생 수칙 정리한 소책자도 제작 콜레라는 19세기를 대표하는 전염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세기를 통해 여러 차례 세계적으로 유행했으며, 국지적인 유행은 수없이 많았다. 조선도 19세기 초반부터 수시로 발생하는 콜레라의 유행으로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다. 1895년에 유행한 콜레라도 그 중 하나였다. 청일전쟁이 끝난 직후인 1895년 여름, 만주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콜레라가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퍼졌다. 이미 여러 차례 콜레라를 경험해서 그 무서움을 알고 있던 조선 정부는 콜레라 방역의 책임을 당시 제중원 원장으로 일하던 에비슨에게 맡겼다. 부탁을 받은 에비슨은 당시 서울에 와있던 선교사들에게 요청해 일종의 위생부를 조직했다. 그들은 서울 외곽의 산에 콜레라 환자 수용소를 만들었고, 심한 설사를 주증상으로 하는 환자 치료를 위해서는 소금물을 주사 하여 탈수 방지와 전해질 불균형의 문제를 해결했고, 그 결과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콜레라가 오염된 물로 전염되는 질병임을 알리고, 오염원이 될 수 있는 곳들을 소독하는 예방적 조치도 취했다. 또 콜레라에 대한 미신적인 관념을 바꾸기 위해 위생수칙 등을 정리한 소책자를 수만 부 제작하여 전국에 배포하고, 교회 모임을 통해 위생 교육을 시키기도 하였다. 특히, 콜레라가 귀신이 아니라 작은 세균에 의해 생긴다는 사실을 알리는 포스터를 제작해서 시내 곳곳에 붙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의 결과로 이전에 비해 희생자의 수도 훨씬 적었다. 또 방역 과정에서 자신들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에비슨을 비롯한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노력을 직접 본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한 긍정적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처럼 기독교가 전염병 유행의 한가운데서 방역의 중심이 되었던 과거를 돌이켜보면, 오늘날 코로나 유행의 와중에 일부 교회가 방역 수칙을 무시하여 발병의 온상이 됨으로써 사회적 지탄을 받는 현실이 더욱 안타깝게 여겨진다. 스페인 독감 관련 논문 게재한 스코필드 박사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스페인 독감이다. 1918〜1919년 전 세계를 강타한 스페인 독감의 대유행은 요즘 코로나의 전 세계적 유행으로 어느 때보다도 자주 소환되고 있다. 스페인 독감은 1919년 3·1운동을 전후하여 우리나라에도 유행하였다. 이에 대한 자세한 보고를 한 사람은 다름아닌 당시 세브란스의전의 세균학 교수로 있던 스코필드 박사였다. 스코필드 박사는 1889년 3월 15일, 럭비의 발상지인 영국 워릭셔(Warwickshire)주 럭비(Rugby)시에서 출생하였다. 1907년 그는 혼자서 캐나다로 이민하였고, 1910년 토론토에 있는 온타리오 수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 그는 온타리오주 보건국 산하의 세균학 연구소에서 근무하였다. 그는 1911년에는 온타리오 수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1914년에는 모교의 세균학 강사가 되었다. 1916년 이른 봄 세브란스연합 의학교의 에비슨 교장의 요청을 받은 스코필드 박사는 1916년 8월 초, 그의 아내 엘리스와 함께 캐나다를 출발하여, 그 해 10월 한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그 스스로 석호필(石虎弼)이라는 이름도 지었다. 돌 석, 호랑이 호, 도울 필. 석은 돌과 같은 굳건한 의지를 나타내며, 호는 호랑이 같은 용맹과 비판정신을 의미하고, 필은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는 자신의 인생관을 담았다. 더욱이 알약을 가리키는 ‘pill’과 발음이 같아 자신이 의학을 공부한다는 것까지 나타내 준다며 평생 자신의 한국 이름을 아꼈다. 1916년 10월 한국에 도착한 스코필드는 4년여 동안 세브란스에서 세균학과 위생학 교육을 담당하였다. 그는 평소 의학도가 지식인으로서 비판정신과 사회적 실천을 실행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에게서 세균학을 배웠던 신현창, 이용설 등과 같은 제자들이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 자신도 실천적 의학자로서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3·1운동의 비폭력 운동을 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일제에 의한 수촌리와 제암리 학살사건에 대한 진상을 폭로하기도 했다. 1920년 그는 일제에 의해 캐나다로 강제 귀국할 수밖에 없었고, 온타리오 수의과대학에서 교육과 연구에 헌신했다. 1958년 은퇴 후에는 한국에서 다시 교편을 잡았다. 한국 사회에서 스코필드 박사는 3·1운동과 관련하여 널리 알려져 있으나, 세균학자로서 그가 세브란스 교수로 있을 당시 세계를 강타했던 스페인 독감에 대한 논문을 써서 세계적인 학술지 에 실은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한국에서의 유행성 독감과 그 병인(Pandemic influenza in Korea with special reference to its etiology)’이란 제목의 논문을 1919 년 4월 미국의학 회지 에 발표했다. 이 논문에 따르면 스페인 독감은 1918년 가을부터 한국에도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는 스페인 독감이 유럽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한반도에 유입된 것으로 보았으며, 당시 인구의 25〜50%가 걸렸던 것으로 추측했다. 또 이 논문에서 스코필드 박사는 세균학자로서 스페인 독감의 원인을 밝혀내기 위한 여러 실험을 한 결과를 실었다. 당시 세균보다는 훨씬 작은 바이러스의 실체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그 원인을 확실하게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여러 실험과 추론을 통해 ‘필터를 통과할 정도의 작은 세균’이 그 원인체일 것이라는 직관적 결론을 내림으로써 진실에 상당히 가까이 다가갔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세브란스는 과거 세계적 전염병이 우리나라를 강타했을 때에 방역활동에 앞장서서 많은 동포들의 생명을 구했을 뿐 아니라, 또한 전염병의 원인에 대한 학문적 연구에도 힘을 기울여 세계적 수준의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오늘날 코로나 감염증의 세계적 유행 속에서도 세브란스는 이러한 과거의 자랑스런 유산을 바탕으로 질병으로부터 인류를 자유롭게하는 그 소명을 다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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