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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이야기] 인물로 보는 연세 150년 ② - 오긍선 세브란스의전 2대 교장
등록일: 2020-03-05  |  조회수: 136

해관(海觀) 오긍선은 1934년~42년 세브란스의전 2대 교장을 지냈다. 세브란스의전의 첫 한국인 교장이자 사학이 수난을 겪은 일제 강점기에 세브란스의전을 지킨 명교장이었다. 1912년부터 30년 간 세브란스의전에 몸담은 의학 교육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인 최초의 의학박사이다. 독립신문을 창간한 독립운동가 서재필이 그에 앞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서 박사는 미국 국적이었다. 해관은 배재학당에서 서재필을 만나 학생자치회인 협성회에 들어갔고 배재학당 대표로 독립협회 간사를 지냈다. 독립협회가 해산된 후 협회의 부활과 구속자 석방을 요구해 체포령이 내려졌고, 침례교 선교사 스테드만 목사 집으로 피신한다. 그 후 선교사들에게 한글 교습을 하다 만난 미국 의료 선교사 알렉산더의 권유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루이빌의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그는 또 한국인 최초의 미국 의료 선교사였고, 한국 의학자로서는 최초로 유럽(오스트리아 빈대학)에서 피부과학을 연구해 국내 의학계에 소개했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고아원과 양로원을 설립해 운영하기도 했다. 
세브란스 교장으로서 그는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무엇보다 세브란스의전을 일본제국 문부성 지정 학교로 만드는 한편 세브란스 의전 출신들이 일제 내무성 발급 의사 면허를 받게 만들었다. 이로써 세브란스의전 출신 의사들은 일본·대만·만주에서도 의사로 활동할 수 있었다. 또 세브란스의 각과 주임교수들을 한국인 교수로 대체했다. 그가 교장이 됐을 때 11명이었던 일본인 강사진은 4명으로 줄었다. 그 결과 일제가 1940년 국내 거주 미국인들에게 추방령을 내렸을 때 세브란스의전은 교수진의 공백 없이 의학 교육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는 졸업생들에게 최초로 학사 학위를 부여했고, 병원이 중심이었던 세브란스를 의학교육 및 연구의 전당으로 변모시켰다. 
그는 세브란스에 65세 정년제도를 만들어 1942년 만 65세에 은퇴했다. 그의 전임자인 에비슨 초대 교장은 74세에 퇴진했다. 독립협회장을 지낸 윤치호가 해관이 퇴임한 해 연희전문 교장에 취임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가 해관보다 13세 많은 78세였다.
해관은 퇴임 후에도 명예 교장이자 재단이사로서 일제의 외풍을 막는 역할을 했다. 단적으로 연희전문은 일제 말 조선총독부에 접수돼 일본인 교장이 부임한 후 대다수의 한국인 교수가 밀려났다. 유억겸·백낙준·최현배 교수도 떠나야 했다. 반면 세브란스의전은 비록 이름은 아사히의전으로 바뀌었지만 한국인 교수 대부분이 자리를 지켰다. 
해관은 세브란스를 떠난 후 86세에 영면하기까지 21년 간 안양기독보육원장으로 있었다. 원장 취임 후 그는 사재를 털어 보육원 부지로 7만 평을 사들여 총 15만 평의 대지에 1백여 명의 고아들의 삶의 터전을 닦았다. 그는 작고하기 1년 전 받은 소파상을 생전에 받은 많은 상 중 가장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갈 곳 없는 고아들을 돌본 공로를 어린이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31년 세브란스 부교장 시절엔 서대문에 경성양로원을 세워 재단이사장을 맡았다. 한국 최초의 양로원이다.
그는 세브란스에서 퇴직한 후 미 군정청의 요직 등 여러 자리를 제의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배재학당 2년 선배인 이승만 대통령의 사회부장관 입각 요청도 고사했다.
당대의 명의이기도 했던 해관은 의사를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세브란스 교장직에서 물러나기 1년 전엔 <동광>지에 “돈 버는 의사보다 병 고치는 의사가 돼라”는 글을 실었다. 세브란스 졸업생과 재학생을 향한 권유였다. 특히 세브란스 졸업 후 바로 개업을 하려는 졸업생들에게 “학교에서 공부한 지침만으로 귀중한 생명을 다루겠다는 건 잘못”이라고 경계했다. 그의 집안에선 4대에 걸쳐 스물여덟 명의 의사가 배출됐지만 자손들에게도 똑같이 가르쳤다. 자신의 집 안방엔 “돈을 사랑함은 만악의 뿌리가 된다”(디모데전서 6:10)고 자필로 써 붙인 후 그 옆에 조선은행권 지폐를 한 장 붙여 놓았다고 한다.
해관에 대해서는 친일 시비가 있다. 일례로 그는 1943년 11월 5일자 매일신보에 태평양전쟁 참전을 독려하는 기고문 ‘주저 말고 돌진하라’를 실었다. 그는 자신의 친일 행위에 대해 세브란스의전 교장 시절에도, 그 후로도 일절 변명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오해를 풀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일제가 강요한 창씨개명만은 끝내 거부했다. 일제 말 모두가 굴욕적으로 창씨개명을 할 때 그는 이를 거부한 몇 안 되는 민족 지도자 중 하나였다. 해관은 세브란스의전을 지키기 위해 일제의 요구에 응했지만 세브란스의전과 무관할 땐 일제의 요구를 거부하고 자신의 소신을 지킨 것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 경성제대 의학부는 일본 학생 비율이 70%였던 반면 세브란스의전은 100% 조선인 학생이었던 사실이 이런 추론을 뒷받침한다(경성제대의 전신 경성의전은 일본인 학생이 80%). 해관이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일제가 중추원 참의를 맡아 달라고 요청했지만 이 당대 최고의 명예직을 그가 사양한 것도 이런 해석을 방증한다.
해관 오긍선은 세브란스에 재직하는 동안 9백여 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이들은 의학계·교육계·정관계 등으로 진출했다. 이들은 해관의 섬김과 나눔 정신을 기리기 위해 우리 학교 의대 본관 입구에 해관의 흉상을 세웠다.

글 / 이필재 (신방 77입) 이코노미스트 인터뷰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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