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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3·1운동과 연세
등록일: 2019-03-11  |  조회수: 228

‘우리 조선은 독립된 나라이고, 조선사람은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새 하와이로 불린 연희전문학교와 학생운동의 중심이 된 세브란스의전 식민지배 당시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의 고등교육을 억제했다. 총독부는「사립학교규칙」 을 개정하고 「전문학교규칙」 을 공포했는데 이 규칙들은 사립학교에서 종교교육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것이었다. 또 고등교육에 해당하는 전문교육을 하려면 상당한 설비와 교원을 갖추고, 학교를 유지할 수 있는 재단법인을 설립하도록 규정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1917년 4월 7일 사립 연희전문학교 기독교연합재단법인의 설립 인가가 났다. 자연스레 교명도 조선기독교대학에서 연희전문학교로 바뀌었다. 1918년 11월 30일 총독부의 ‘경성 민정휘보’라는 제목이 붙은 첩보 문서에는 근래 경성의 청년들 사이에서 ‘새(新) 하와이’라는 말이 유행한다는 보고가 있었다. ‘새 하와이’는 경성 시외의 고양군 연희면 창천리를 가리키며 그곳에는 연희전문학교가 있었다. 하와이에서 반일 조선인들이 불온한 말을 쉬지 않는 것처럼 연희전문학교 학생들도 항상 그렇다는 것이었다. 독립운동에 앞장선 세브란스인은 의사, 간호사, 학생, 교직원 할것 없이 60여 명에 이른다. 특히, 제약주임이던 이갑성 동문(의학 15졸)은 각 전문학교 대표들과 함께 시위운동을 주도하며 독립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김원벽(상과 17입)

김원벽 동문은 3·1운동 중앙지도체 49인 중 1인으로 활동했다. 1919년 1월 경성 시내 전문학교 학생대표 회동에 참석하여 국제 정세와 시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2월 초 독립운동에 참가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만세운동 추진을 위해 학생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고 각 중등학교 대표를 뽑아 학생들을 결속시켰으며, 독립선언서 운반과 배포 장소를 학교별로 정하였다. 1919년 2월 12일과 14일 음악회를 구실로 남대문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구내의 이갑성 동문의 집에서 각 전문학교의 대표자들과 모여 시위를 준비하고, 2월 28일 정오의 기도회를 이용해서 만세시위 일정과 장소를 공지했다. 3월 1일 정오가 지나자 시내 각 전문학교와 중등학교 학생을 비롯한 수만의 군중이 탑골공원에 모였다. 손병희 등 33인은 급히 장소를 변경하여 인근의 태화관에서 모임을 가졌다. 민족대표를 기다리던 학생들은 결국 두시 반쯤에 탑골공원에서 독자적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위행진에 나섰다. 경성 전역에서 벌어진 만세시위는 결국 경찰과 헌병의 탄압으로 해산되었지만, 김원벽 동문은 3월 4일 각 학생 대표들과 배재고등보통학교 기숙사에 모여 3월 5일의 독립만세운동계획을 확인하고 시간과 장소를 오전 8시 남대문역(현재 서울역) 광장으로 정하였다. 이튿날 약속 장소인 서울역 광장에는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들고 남대문 쪽으로 향하여 시위 군중을 지휘하였다. 이 때 출동한 일본 경찰에 잡혀 2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잡지 <신생활>과 일간지 <시대일보> 창간에 참여 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폐간되는 등 실패하자 낙향한 후 1928년 별세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국가보훈처에서 2018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이갑성(의학 15졸)

이갑성 동문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최연소자로, 청년층을 대표하여 민족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1919년 2월 세브란스병원의 제약주임이던 이갑성 동문은 서울 시내 각 전문학교 대표자들을 집으로 초청해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비롯한 각급 학교의 시위운동을 주도했다. 태화관을 중심으로 한 민족대표의 서명운동과 전단 살포의 중책을 맡아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6년 YMCA의 이사를 맡아 청년들을 지도하였으며, 1931년 경성공업의 지배인을 지냈다. 같은 해 신간회사건으로 상해로 망명했다가 귀국한 뒤 1940년 흥업구락부사건으로 체포되어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독립촉성국민회 회장을 지냈으며, 1947년 과도입법의원의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제2대 민의원에 당선했고, 1952년 국민회의 최고위원에 추대되었다. 1953년 자유당 최고위원에 임명되었고, 33인유족회장·국산부흥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 발기위원을 지냈고, 1965년 광복회장, 이준열사기념사업회 총재를 맡았다. 80세 이후에는 민족대표 33인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해마다 거행되는 3·1기념행사에 참석하다가 여생을 마쳤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이용설(의학 19졸)

이용설 동문은 1919년 이갑성 동문의 집에 모인 각 전문학교 대표 중 세브란스의전 학생으로 김문진(의학 21졸)과 함께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919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마친 뒤 베이징 협화대학 부속병원에 근무하였다. 이때 안창호를 만나 그의 사상에 감명을 받아 1924년 흥사단에 입단한다. 1929년 이사회장을 역임하는 등 일생동안 흥사단운동에 헌신하였다. 1926년 미국 시카고 서북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세브란스의과대학 교수가 되었다. 광복 후 과도정부 보건후생부장을 지냈고, 그 뒤 세브란스병원장, 제4대 연대동문회장·동명학원 이사장·국제외과학회 한국지회장·대한나협회장·서울국제로터리회장·대한적십자 중앙위원·대한병원협회장·기독교장로회장 등 다방면에 걸쳐 사회봉사의 훌륭한 업적을 쌓았다. 질소검박·근면절약·애국애족의 생활철학을 몸소 실천하여 나라의 원로로서 국민의 많은 존경을 받았다. 또한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진실과 봉사정신의 모범을 보이기도 하였다.

배동석(의학 17입)

배동석 동문은 항일운동을 한 이유로 두 차례 체포되어 복역한 후 만주에서 김좌진과 함께 활동했다. 김원벽, 이용설 동문과 함께 이갑성 동문의 집에서 3·1운동 전개를 의논하고 1919년 3월 1일 학생대표로 탑골공원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앞장섰으며, 경남 지역의 3·1운동을 주도했다. 만세시위운동 후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고문후유증으로 옥사하였다. 1980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김병수(의학 21졸) 김병수 동문은 서울의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고향인 군산에서 학교 은사인 박연세를 방문하여 이갑성에게 받은 독립선언서를 전달한다. 김 동문의 활약으로 군산에서 전북 최초의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송춘근(의학 23졸), 안상철(의학 29졸) 등이  만세시위에 동참해 독립운동 유공자로 서훈을 받았고, 이외에도 세브란스의 다양한 직군의 사람들이 독립을 위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3월 5일 학생대표들이 제2차 만세시위를 전개한 남대문역 전경(1920년)             

백진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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